
21세기 들어 문자보다 이미지의 힘이 더 부각되고 있다. 백만 권이 팔리는 소설책은 드물지만 영화는 천만인이 보는 시대다. 열 마디 말보다 이모티콘 하나로 의도를 더 잘 전할 수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다니게 되면서 사진과 동영상 콘텐츠가 텍스트를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을 넘어서 다중 문해력이 주목받는 시대다. 책과 신문만 읽을 줄 알면 되었던 20세기와 달리 다양한 미디어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미디어가 던지는 메시지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미디어 문해력, 디지털 문해력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하지만 모든 문해력의 기초는 사고력과 상상력이다. 사고력은 어휘력을 벗어나지 못한다. 디지털 문해력을 걱정하기 전에 어휘력부터 기를 일이다. 인터넷 시대에 아이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접하고 촌철살인의 댓글을 쓸 수 있어도 긴 글을 읽고 쓸 수 없다면 깊이 있는 사고는 힘들다. 소수의 엘리트들만 깊이 있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아도 사회는 돌아가겠지만 민주적인 사회의 모습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문해력을 기초로 성립한다. 문해력이 있는 시민은 공동체의 주요 문제에 대해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고, 맥락이 왜곡된 가짜뉴스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이해하다’에 해당하는 영어 낱말 ‘understand’는 말 그대로 ‘아래에 서다’란 뜻이다. 이 말에는 자기를 내려놓아야만 제대로 듣고 보고 이해할 수 있다는 통찰이 담겨 있다. 익숙한 세계로부터 낯선 세계로 걸음을 내딛는 ‘도약’ 또는 ‘비상’이 우리를 성장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듣기와 읽기는 종교적 경험과도 통한다. 사랑의 세계는 타자의 말이 들리는 세계다. 타자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때, 수신할 수 있을 때 발신이 가능하다. 듣지 못하면 말을 할 수 없듯이, 읽을 줄 모르면 글을 쓰지 못한다. 듣기와 말하기, 읽기와 쓰기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말하기와 쓰기에 앞서 듣기와 읽기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까닭이다.
듣기가 시간적 경험이라면 읽기는 공간적 경험이다. 말이 발화되는 순간부터 시간과 함께 흐르면서 맥락이 만들어진다. 처음 발화된 말은 발화된 그 순간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뒤에 발화된 말에 의해 비로소 의미가 확정된다. 청자는 화자의 말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맥락 안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말의 의미를 조합해낸다. 반면에 읽기의 경우는 지금 여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텍스트 위를 독자가 종횡무진 오가면서 의미를 조합해낸다. 듣기가 시간 여행이라면 읽기는 공간 여행인 셈이다. 듣기가 귀납식으로 의미에 다가간다면 읽기는 연역식으로 다가간다.
뉴스를 종이신문으로 읽는 것과 스마트폰으로 보는 것은 상당히 다르다. 종이신문을 볼 때 우리는 전체를 스윽 훑어보면서 그 중에 눈에 들어오는 사진이나 제목에 눈길이 멈추면 그제서야 기사를 읽기 시작한다. 스캐닝 다음에 리딩이 시작된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진행하는 연역식 읽기가 자동으로 된다. 때로는 1면 톱기사부터 읽기 시작할 수도 있지만 그럴 때도 제목과 사진, 기사 전체를 한눈에 스캔한 다음 작은 글자로 된 기사를 읽는다. 디지털 매체는 종이매체에 비해 스캐닝이 힘들다. 화면 자체가 작기 때문에 스크롤을 해도 전체를 한눈에 보기가 쉽지 않다.
종이신문을 읽을 때는 자신이 기대하지 않았던 정보도 눈에 들어온다. 애써 읽으려 하지 않아도 제목이 눈에 들어오기도 하고, 사진이 시선을 끈다. 나의 알고리즘이 아닌 다른 알고리즘이 작동할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넓은 셈이다. 디지털 신문의 경우 주요 뉴스 제목을 통해 감을 잡을 수도 있지만 종이신문에 비해 스캐닝 기능은 훨씬 떨어진다. 유튜브 같은 동영상 매체의 경우는 그 가능성이 더욱 좁아진다. 비슷한 정보를 자동으로 검색해서 보여주는 컴퓨터 알고리즘 덕분에 보고 싶은 기사만 보게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진다.
필터링 검색 알고리즘은 우리 뇌에 장착되어 있는 알고리즘을 흉내낸 것이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처럼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먼저 인식하는 자동 알고리즘을 장착하고 있다. 듣기와 읽기의 메커니즘 역시 이러한 알고리즘에 기반하여 작동한다. 그 알고리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배움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아날로그 세계든 디지털 세계든 그 알고리즘 속에 내재된 위험을 인지하고, 타자를 적으로 돌리는 혐오와 배제의 문법이 아니라 사랑의 문법을 체득하게 돕는 것이 리터러시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방향일 것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21세기 들어 문자보다 이미지의 힘이 더 부각되고 있다. 백만 권이 팔리는 소설책은 드물지만 영화는 천만인이 보는 시대다. 열 마디 말보다 이모티콘 하나로 의도를 더 잘 전할 수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다니게 되면서 사진과 동영상 콘텐츠가 텍스트를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을 넘어서 다중 문해력이 주목받는 시대다. 책과 신문만 읽을 줄 알면 되었던 20세기와 달리 다양한 미디어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미디어가 던지는 메시지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미디어 문해력, 디지털 문해력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하지만 모든 문해력의 기초는 사고력과 상상력이다. 사고력은 어휘력을 벗어나지 못한다. 디지털 문해력을 걱정하기 전에 어휘력부터 기를 일이다. 인터넷 시대에 아이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접하고 촌철살인의 댓글을 쓸 수 있어도 긴 글을 읽고 쓸 수 없다면 깊이 있는 사고는 힘들다. 소수의 엘리트들만 깊이 있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아도 사회는 돌아가겠지만 민주적인 사회의 모습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문해력을 기초로 성립한다. 문해력이 있는 시민은 공동체의 주요 문제에 대해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고, 맥락이 왜곡된 가짜뉴스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이해하다’에 해당하는 영어 낱말 ‘understand’는 말 그대로 ‘아래에 서다’란 뜻이다. 이 말에는 자기를 내려놓아야만 제대로 듣고 보고 이해할 수 있다는 통찰이 담겨 있다. 익숙한 세계로부터 낯선 세계로 걸음을 내딛는 ‘도약’ 또는 ‘비상’이 우리를 성장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듣기와 읽기는 종교적 경험과도 통한다. 사랑의 세계는 타자의 말이 들리는 세계다. 타자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때, 수신할 수 있을 때 발신이 가능하다. 듣지 못하면 말을 할 수 없듯이, 읽을 줄 모르면 글을 쓰지 못한다. 듣기와 말하기, 읽기와 쓰기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말하기와 쓰기에 앞서 듣기와 읽기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까닭이다.
듣기가 시간적 경험이라면 읽기는 공간적 경험이다. 말이 발화되는 순간부터 시간과 함께 흐르면서 맥락이 만들어진다. 처음 발화된 말은 발화된 그 순간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뒤에 발화된 말에 의해 비로소 의미가 확정된다. 청자는 화자의 말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맥락 안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말의 의미를 조합해낸다. 반면에 읽기의 경우는 지금 여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텍스트 위를 독자가 종횡무진 오가면서 의미를 조합해낸다. 듣기가 시간 여행이라면 읽기는 공간 여행인 셈이다. 듣기가 귀납식으로 의미에 다가간다면 읽기는 연역식으로 다가간다.
뉴스를 종이신문으로 읽는 것과 스마트폰으로 보는 것은 상당히 다르다. 종이신문을 볼 때 우리는 전체를 스윽 훑어보면서 그 중에 눈에 들어오는 사진이나 제목에 눈길이 멈추면 그제서야 기사를 읽기 시작한다. 스캐닝 다음에 리딩이 시작된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진행하는 연역식 읽기가 자동으로 된다. 때로는 1면 톱기사부터 읽기 시작할 수도 있지만 그럴 때도 제목과 사진, 기사 전체를 한눈에 스캔한 다음 작은 글자로 된 기사를 읽는다. 디지털 매체는 종이매체에 비해 스캐닝이 힘들다. 화면 자체가 작기 때문에 스크롤을 해도 전체를 한눈에 보기가 쉽지 않다.
종이신문을 읽을 때는 자신이 기대하지 않았던 정보도 눈에 들어온다. 애써 읽으려 하지 않아도 제목이 눈에 들어오기도 하고, 사진이 시선을 끈다. 나의 알고리즘이 아닌 다른 알고리즘이 작동할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넓은 셈이다. 디지털 신문의 경우 주요 뉴스 제목을 통해 감을 잡을 수도 있지만 종이신문에 비해 스캐닝 기능은 훨씬 떨어진다. 유튜브 같은 동영상 매체의 경우는 그 가능성이 더욱 좁아진다. 비슷한 정보를 자동으로 검색해서 보여주는 컴퓨터 알고리즘 덕분에 보고 싶은 기사만 보게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진다.
필터링 검색 알고리즘은 우리 뇌에 장착되어 있는 알고리즘을 흉내낸 것이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처럼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먼저 인식하는 자동 알고리즘을 장착하고 있다. 듣기와 읽기의 메커니즘 역시 이러한 알고리즘에 기반하여 작동한다. 그 알고리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배움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아날로그 세계든 디지털 세계든 그 알고리즘 속에 내재된 위험을 인지하고, 타자를 적으로 돌리는 혐오와 배제의 문법이 아니라 사랑의 문법을 체득하게 돕는 것이 리터러시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방향일 것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