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여름이 우리 생애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거라 했던가. 여름휴가를 미루고, 폭염 속에서 꼼질꼼질 마감을 하는 중이다. 숨막히는 열기를 맨몸으로 견디는 실외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에어컨 돌아가는 편집실에 앉아 폭염을 말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전 세계의 기온 기록이 수백 건 경신되는 흐름에서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서울 도심의 밤 기온이 30도를 웃돌며, 선선한 저녁이면 동네 꼬마들이 모여들던 놀이터도 텅 비었다. 폭염 속에서도 밥벌이를 놓을 수 없는 어른뿐 아니라, 놀 곳을 잃어버린 아이들도 낯선 여름을 힘겹게 견디고 있다.
최근의 기록적인 폭염은 필시 재난이다. 유엔은 재난을 ‘공동체나 사회의 기능이 심각하게 붕괴되어, 자체 자원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는 수준의 인적·물적·경제적·환경적 피해를 초래하는 사건’이라고 규정한다. 기후학자들은 이러한 극한 폭염은 더 자주 발생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선 해마다 반복되는 새로운 일상, 곧 ‘뉴노멀(New Normal)’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한다.
과도한 탄소 배출로 지구의 기후체계가 급격히 변하는 현상을 ‘기후변화(climate change)’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2019년 영국 《가디언》은 편집 지침을 바꾸어 ‘기후위기(crisis)’와 ‘기후비상사태(emergency)’라는 표현을 쓰기로 했다. ‘기후변화’로는 사태의 긴급성과 심각성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판단에서다. 최근에는 ‘기후재난(disaster)’이라는 표현도 언론과 연구에서 자주 등장한다. 현실이 언어를 바꾸고 있는 셈이다. 100여 년 동안 인류가 확장해온 농경지와 도시, 산업 시설이 자연 생태계를 급격히 변화시키며 오늘날 기후위기를 가속하고 있다.
그간 학교는 환경교육, 지속가능발전교육(ESD), 탄소중립교육, 기후위기교육이란 이름으로 기후 문제를 다루어왔다. 이름과 내용은 시기별로 다르지만 이 정책들에 공통점이 있다. ‘개인의 좋은 생활습관’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환경교육에서는 자연보호 같은 실천을 내세웠고 탄소중립교육에서는 탄소발자국 줄이기, 쓰레기 분리수거, 에너지 절약 같은 개인 실천을 강조했다. 최근의 기후위기교육도 캠페인, 행사 중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또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나, 한 개인에게 기후문제는 너무 거대하고 아득한 것이어서 그런 단편적 실천으로는 학생들에게 ‘내가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무력감을 줄 수 있다.(사실 실천으로 이어질 만큼 교육적 효과를 내는 경우도 드물다.) 탄소를 배출하는 일상을 변함없이 지속하면서 “지구야, 미안해”를 가르치는 것은 모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은 ‘서사적 상상력’으로서의 기후정의를 다루어야 할 때다. 마사 누스바움이 말한 서사적 상상력은 “타인의 삶을 하나의 구체적인 이야기로 이해하고, 다른 위치에 놓인 사람의 경험을 상상하는 능력”이다. 기후재난은 정책과 산업, 도시계획, 국제협력, 공동체의 선택이 함께 작동하는 문제인 동시에 누군가의 삶에 불평등하게 새겨지는 현실이다. 이런 구조와 삶의 연결을 이해할 때 아이들은 자신을 ‘변화를 만들어가는 시민’으로 인식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기후교육이 ‘지구를 지키는 방법’을 가르쳤다면, 폭염과 홍수가 ‘뉴노멀’이 될 시대에는 ‘기후재난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기후문제는 청소년들의 신체뿐 아니라, 정신에도 영향을 미친다. 2021년 의학저널《The Lancet Planetary Health》에 발표된 연구에서 10개국 1만 명 청소년 중 59%가 기후변화에 대해 ‘매우 또는 극도로 걱정한다’고 답했다. 75%는 미래가 두렵다고 했으며, 절반 이상은 정부가 미래세대를 충분히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몇 해 전 기후행동 인터뷰에서 만난 청소년이 말했다. “어차피 다 망할 건데 열심히 살아서 뭐하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 말을 들으면 이들에게 기후교육을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 마음이 무겁다. 기성세대가 누려온 풍요의 대가로 생긴, 갚을 수도 없는 빚을 다음 세대에게 떠넘기는 것 같아서다. 기후교육을 할 때 ‘너희가 해결해야 해’가 아니라 ‘우리 같이 해보자’로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먼저 배워버린 무력감과 냉소를 과연 희망으로 바꿀 수 있을까. 무너지는 세계에서도 서로의 삶을 지켜내는 시민으로 성장하게 돕는 것은, 염치 불고하고 기성세대가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마지막 의무일 것이다.
_장희숙(민들레 편집장)
올여름이 우리 생애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거라 했던가. 여름휴가를 미루고, 폭염 속에서 꼼질꼼질 마감을 하는 중이다. 숨막히는 열기를 맨몸으로 견디는 실외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에어컨 돌아가는 편집실에 앉아 폭염을 말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전 세계의 기온 기록이 수백 건 경신되는 흐름에서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서울 도심의 밤 기온이 30도를 웃돌며, 선선한 저녁이면 동네 꼬마들이 모여들던 놀이터도 텅 비었다. 폭염 속에서도 밥벌이를 놓을 수 없는 어른뿐 아니라, 놀 곳을 잃어버린 아이들도 낯선 여름을 힘겹게 견디고 있다.
최근의 기록적인 폭염은 필시 재난이다. 유엔은 재난을 ‘공동체나 사회의 기능이 심각하게 붕괴되어, 자체 자원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는 수준의 인적·물적·경제적·환경적 피해를 초래하는 사건’이라고 규정한다. 기후학자들은 이러한 극한 폭염은 더 자주 발생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선 해마다 반복되는 새로운 일상, 곧 ‘뉴노멀(New Normal)’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한다.
과도한 탄소 배출로 지구의 기후체계가 급격히 변하는 현상을 ‘기후변화(climate change)’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2019년 영국 《가디언》은 편집 지침을 바꾸어 ‘기후위기(crisis)’와 ‘기후비상사태(emergency)’라는 표현을 쓰기로 했다. ‘기후변화’로는 사태의 긴급성과 심각성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판단에서다. 최근에는 ‘기후재난(disaster)’이라는 표현도 언론과 연구에서 자주 등장한다. 현실이 언어를 바꾸고 있는 셈이다. 100여 년 동안 인류가 확장해온 농경지와 도시, 산업 시설이 자연 생태계를 급격히 변화시키며 오늘날 기후위기를 가속하고 있다.
그간 학교는 환경교육, 지속가능발전교육(ESD), 탄소중립교육, 기후위기교육이란 이름으로 기후 문제를 다루어왔다. 이름과 내용은 시기별로 다르지만 이 정책들에 공통점이 있다. ‘개인의 좋은 생활습관’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환경교육에서는 자연보호 같은 실천을 내세웠고 탄소중립교육에서는 탄소발자국 줄이기, 쓰레기 분리수거, 에너지 절약 같은 개인 실천을 강조했다. 최근의 기후위기교육도 캠페인, 행사 중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또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나, 한 개인에게 기후문제는 너무 거대하고 아득한 것이어서 그런 단편적 실천으로는 학생들에게 ‘내가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무력감을 줄 수 있다.(사실 실천으로 이어질 만큼 교육적 효과를 내는 경우도 드물다.) 탄소를 배출하는 일상을 변함없이 지속하면서 “지구야, 미안해”를 가르치는 것은 모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은 ‘서사적 상상력’으로서의 기후정의를 다루어야 할 때다. 마사 누스바움이 말한 서사적 상상력은 “타인의 삶을 하나의 구체적인 이야기로 이해하고, 다른 위치에 놓인 사람의 경험을 상상하는 능력”이다. 기후재난은 정책과 산업, 도시계획, 국제협력, 공동체의 선택이 함께 작동하는 문제인 동시에 누군가의 삶에 불평등하게 새겨지는 현실이다. 이런 구조와 삶의 연결을 이해할 때 아이들은 자신을 ‘변화를 만들어가는 시민’으로 인식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기후교육이 ‘지구를 지키는 방법’을 가르쳤다면, 폭염과 홍수가 ‘뉴노멀’이 될 시대에는 ‘기후재난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기후문제는 청소년들의 신체뿐 아니라, 정신에도 영향을 미친다. 2021년 의학저널《The Lancet Planetary Health》에 발표된 연구에서 10개국 1만 명 청소년 중 59%가 기후변화에 대해 ‘매우 또는 극도로 걱정한다’고 답했다. 75%는 미래가 두렵다고 했으며, 절반 이상은 정부가 미래세대를 충분히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몇 해 전 기후행동 인터뷰에서 만난 청소년이 말했다. “어차피 다 망할 건데 열심히 살아서 뭐하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 말을 들으면 이들에게 기후교육을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 마음이 무겁다. 기성세대가 누려온 풍요의 대가로 생긴, 갚을 수도 없는 빚을 다음 세대에게 떠넘기는 것 같아서다. 기후교육을 할 때 ‘너희가 해결해야 해’가 아니라 ‘우리 같이 해보자’로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먼저 배워버린 무력감과 냉소를 과연 희망으로 바꿀 수 있을까. 무너지는 세계에서도 서로의 삶을 지켜내는 시민으로 성장하게 돕는 것은, 염치 불고하고 기성세대가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마지막 의무일 것이다.
_장희숙(민들레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