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권과 아동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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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학대와 아동보호 사이

 

아동학대 관련 뉴스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뉴스를 보면 아동학대가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언론에 보도되는 사건이 늘어났을 뿐이다. 그만큼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는 반증일 것이다. 예전에는 맞는 아이들을 봐도 무심코 지나치던 사람들이 이제는 아동학대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아동을 보호하는 제도도 조금씩 보완되는 중이다. 학대당하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아이들을 보호하는 문화가 정착되고 있다.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신호위반에 대한 규제가 엄격해지고, 아동돌봄에 대한 정부지원도 늘어나고 있다.

오늘날 아동을 ‘보호’하는 일은 당연한 일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그 관점은 아동을 주체적 인간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명백히 성인의 돌봄이 필요한 어린아이들의 경우 보호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보니, 이런 관점이 아동기 전반으로 확대되면서 아이들을 권리의 주체가 아닌 보호 대상으로 보는 문화가 만들어진다. 아이들에게도 천부 인권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오늘날 서구사회는 어린아이들만 집에 두고 외출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할 만큼 아동보호 정책이 엄격하지만, 이런 문화의 이면에는 이들을 미성숙한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이 깔려 있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아동기’에 대한 인식이 생겨난 것은 불과 2백여 년 전이다. 서양 회화에서 아동이 독립적인 피사체로 등장한 것이 16세기 중반이다. 그 이전에 아이들은 이유기가 끝나고 몇 년이 지나 일곱 살쯤 되면 곧바로 어른들 세계에 편입되었다. 남자아이들은 남자들의 공동체에 들어가 나이를 불문하고 친구와 일, 놀이를 공유했다.(필립 아리에스, 『아동의 탄생』,  645p)   남자족과 여자족으로 나뉘어 생활하는 것이 부족사회의 특징이다. 한국 전통사회에서도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이들은 일곱 살이 되면 각각 남자족, 여자족에 소속되어 사회화 과정을 거쳤다.

근대 초기만 해도 열 살 정도면 어른들 사회에 편입될 수 있었다.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아이들은 부려먹기 좋은 ‘작은 인간’이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고발하는 19세기 영국의 아동노동 현실은 오늘날 서구문명의 어두운 과거를 증언한다. 어린 소년 소녀들이 공장의 비위생적인 기숙사에서 먹고 자면서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했다.(당시 성냥 제조업체 조사에 따르면 노동자 중 270명이 18세 미만, 40명이 10세 미만, 그중 10명은 8세, 5명은 겨우 6세였다.)  한 소녀의 검시 보고서에는 궁중무도회에서 귀부인들이 입을 의상을 만드느라 26시간을 쉬지 못하고 일한 정황이 기록되어 있다. 불과 2백 년 전의 일이다.

산업이 발전하면서 아동노동의 필요성이 줄어들고 의무교육이 확대되었다. 학력 인플레가 일어나면서 이제 아이들은 공장 대신 학교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열 살쯤 되면 어른과 별 다르지 않은 사회적 존재로 인정받고 사회활동을 하던 시대와 스물 살이 되어서야 어른으로 인정받는 시대 중 어느 쪽이 나을까? 공장에 갇혀 날마다 야근하는 삶보다 학교에 갇혀 야간 학습노동을 하는 삶이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서구사회에서 아이들 삶의 질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아동인권이 보장되는 서구사회에서도 부모의 교육권이 우선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한국사회에서 이는 더욱 극적으로 나타난다. 교육열이 유난한 부모들은 아이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상 학대에 가깝게 아이들을 학습노동으로 내몬다. 국가 또한 야간자율학습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밤늦도록 붙들어두는 데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아이들의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는 말은 오늘날에도 빈말이 아니다. 흰색 속옷을 입지 않은 여중생, 도서관에서 소설책을 대출한 고3을 적발해 벌하는 학교가 아직도 있을 정도다.

동서를 불문하고 부모의 친권이 아동의 권리보다 더 강한 문화적 배경에는 종교의 뿌리가 깊이 뻗어 있다. 신과 인간의 관계가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복제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유교 문화권과 기독교 문화권은 아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비슷하다. 근대 초기에 서구의 예수교 계통 학교들이 학생들에게 신앙과 엄격한 윤리 규범을 강요했듯이, 조선의 공립학교였던 향교는 제사를 지내고 윤리를 가르치는 데 주력했다. 사실상 각각의 문화권이 필요로 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사제 양성 기능을 교육기관이 한 셈이다.

  

절대적 친권과 기독교

 

기독교의 세계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구약과 신약의 세계관이다. 그 세계관은 신을 어떤 존재로 여기는가에 따라 규정된다. 석판에 열 가지 계명을 새겨주고서 그것을 제대로 지키는지 지켜보는 엄격한 아버지가 구약의 하나님이라면 신약의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보내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도록 한 자애로운 아버지다. 다같이 ‘아버지 하나님’이라 불리지만 그 ‘아버지’의 모습은 판이하다. 기독교계의 보수와 진보는 구약과 신약의 아버지 중 어떤 아버지를 믿느냐에 따라 갈린다고도 볼 수 있다.

율법의 하나님 ‘야훼’는 엄격한 법집행자다. 그는 심지어 자신을 따르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뿐인 아들을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한다. 아브라함은 이 어처구니없는 명령에도 묵묵히 따르는 절대적 순종을 보인다. 그리하여 그 또한 자식의 생명까지 좌지우지하는 절대적 친권을 행사한다. 구약의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순종’이 제1가치가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목소리가 큰 것은 엄격한 아버지의 목청이 큰 것과도 통한다. 질투하고 분노하는 아버지를 섬기는 자녀들이 그를 닮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

반면 신약의 하나님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거저 죄를 사해준다. 예수는 율법을 잘 지켜 스스로 당당하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을 오히려 나무란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브앤테이크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오만이 원죄라는 것이 실존주의 신학의 관점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사실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모습에 더 가깝다. 가톨릭이 ‘성모 마리아’라는 여성을 부각시킨 데는 아버지에게 부족한 자애로운 모습을 보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 후 프로테스탄트가 엄격한 윤리성을 강조하면서 성모 마리아를 배척하게 된 것은 논리적인 귀결이다.

기독교는 사실상 신약에 의거해 성립한 종교이지만 구약성경을 정경으로 받아들이면서 유대교와 혼합된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이들로서는 구약의 신을 섬기는 것이 유리하므로 사실상 로마가톨릭 때부터 기독교의 신은 아브라함과 모세의 하나님이었다. 종교개혁도 아버지를 바꾸진 못했다. 프로테스탄트에 뿌리를 둔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청교도의 지적 전통 대신 개척시대에 필요한 열정을 불어넣음으로써 미국인들을 사로잡았다. ‘성경 말고는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외치고 다닌 스타 목사들은 사실상 미국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원조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미국 복음주의 교회가 반지성적이고 보수적인 색채를 띠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이는 그대로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로 이어진다. 미국 개척시대의 종교적 열정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그대로 재현되어 나타났다. 미국 복음주의 선교사들의 열성적인 전도 활동과 미국으로 유학 가서 복음주의 세례를 받고 돌아온 목사들의 열정이 이룬 역사다. 사실 한국사회의 정신적 토양인 유교의 엄격한 아버지상은 아브라함의 신과 닮은 점이 많다. 유교와 보수적 기독교의 친화성이 한국에서 기독교가 번성하는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몇몇 유명 목사들의 탁월한 설교 능력만으로 오늘날 대형교회의 성공을 설명하기는 힘들다(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역사하심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되겠지만).

미국 법률의 친권 우선주의 바탕에는 엄격한 아버지상에 대한 믿음이 있다. 미국 홈스쿨링 가정의 아동학대 실태를 연구한** 하버드대 교수 엘리자베스 바톨렛가 ‘친권 절대주의’라고 명명하는 문화의 배경에는 이러한 종교적 전통이 깔려 있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미국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홈스쿨링의 보수화는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크리스마스 대신 ‘촘스키의 생일’을 축하하는 좌파 홈스쿨러들이 등장하는 영화 <캡틴 판타스틱>의 홈스쿨링 가정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우파와 좌파의 몸통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신념이 어떤 것이든, 신념에 찬 아버지의 교육 방식은 아동학대적 요소를 띠고 있기 마련이다.

 

 유교와 천도교의 아동관

 

한국사회도 미국사회 못지않게 친권을 우선하는 사회다. 친권 중에서도 아버지의 권리가 더 우선이다. 이혼 후 아이 양육을 맡은 여성이 아이의 성을 바꾸려면 매우 까다로운 법적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겠지만, 오늘날 복음주의 기독교의 세계관도 이러한 경향성을 강화하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금하듯이 아버지의 성을 버리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다.

삼강오륜이 십계명 못지않은 힘을 발휘하는 문화 속에서 아이들의 인권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다.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젖 떼면 어른이 되는, ‘아동기’라는 개념조차 없는 시대에 아동의 권리라는 말은 생겨날 수 없었다. 나이가 권력이 되고, 어른의 말이 곧 법이 되는 시대에 아이들, 그중에서도 사회적 신분이 낮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사람 대접 받기조차 어려웠다. 조선시대에는 ‘종 딸년 웃방 아기 들이듯’이라는 말이 당연지사를 일컫는 속담처럼 쓰일 정도로 아동 성폭력은 일상다반사였다.

그런 문화 속에서도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동학운동을 통해 평등과 아동인권에 대한 의식이 자생적으로 생겨나 확산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자신의 여종 둘을 각각 딸과 며느리로 삼아 평등사상을 몸소 실천했다. 2대 교조 최시형은 ‘어린이도 한울님’이라고 선언했고, 3대 교조 손병희의 사위이기도 한 방정환은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1923년 처음 기념식을 열어 세계 최초로 아동권리선언을 발표했다. 그해 창간한 월간 『어린이』는 연간 10만 부를 찍을 만큼 인기를 누리면서 아동문학의 지평을 열어젖혔다.(『어린이』는 1931년 방정환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꾸준히 발간되다가 일제의 한글 말살 정책이 시행되면서 1937년에 폐간되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아동과 성인의 경계는 그다지 뚜렷하지 않았다. 방정환은 소학교를 다니던 10세 나이에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동화 구연과 연설회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소학생 중에는 대중 연설을 잘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오늘날 ‘초딩’이라 일컬어지는 연령대의 아이들이 4.19 혁명 당시만 해도 단체로 시위에 나서곤 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사회로 나가는 아이들이 적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 후 의무교육이 확대되고 학력 인플레 현상이 가속되어 ‘청소년기’라는 개념이 들어서면서 아동과 성인 사이에는 넘기 힘든 선이 그어졌다(최근에는 취업난으로 인해 청년기라는 또 하나의 과도기가 만들어지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인해 예전에는 아이들이 접근할 수 없었던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아동기’가 사라지는 현상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댓글의 익명성은 아이들 또한 여론의 장에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게 만든다. 뉴스 댓글 중 초등아이들의 댓글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할 것이다. 디지털 세계에서는 나이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근대 초기에 ‘아동’이 발견되면서 아동인권에 대한 의식이 생겨났다면, 탈근대 시대에는 아동과 성인의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인권도 동등해질까?

방정환 선생이 아동권리선언을 발표하고 백여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부모의 친권이 학대당하는 아이들의 생존권보다 우선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형사소송법에는  '자기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을 고소하지 못한다'(제224조)는 조항이 아직도 건재하다.  가정에서 학대당하는 아이들을 보호하는 정책이 시행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말이 되어서였다. 1998년 영훈이 남매 사건으로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제고되면서 ‘가정폭력범죄 및 성폭력범죄에 대한 특례법’이 제정되어 직계존속을 고소할 수 있게 되었다. ‘교양을 위해 자녀를 체벌할 수 있다’고 규정한 민법 조항이 삭제된 것은 법 제정 후 63년이 지난 올 1월이었다.(친권자가 자녀를 보호하거나 교양하기 위해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다고 명시한 민법 제915조를 삭제한 민법 개정안이 2021년 1월 8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성문법은 불문법인 윤리와 문화를 바탕으로 한다. 법조항이 바뀐다고 문화가 하루아침에 달라지기는 힘들다. 아이들을 미숙한 존재로 여기는 문화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듯이 쉽게 사라지진 않겠지만, 아이들을 어른과 다른 특성을 지닌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하는 것이 부모 자녀 관계나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더 풍요롭게 할 것이다. 아동인권을 보장하는 일은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같은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일과 맥이 이어진다. 아이들을 학대하는 사회에서는 동물도 학대당하기 마련이다. 약자를 대하는 문화가 그 사회의 문화수준을 결정한다. 


* 20세기 초에 활동한 빌리 선데이 목사는 대강당에서 밴드와 곡예 등 화려한 무대 퍼포먼스를 겯들인 설교로 수많은 미국인들을 ‘회심’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회심시킨 신자들에게 1인당 ‘회심료’ 2달러씩을 걷어 들여 대부호가 되었다.(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168p)

** Elizabeth Bartholet, ‘Homeschooling: Parent Rights Absolutism vs. Child Rights to Education & Protection’, Arizona Law Review.(https://arizonalawreview.org/pdf/62-1/62arizlrev1.pdf), 민들레 134호, ‘미국의 홈스쿨링과 아동인권’ 참조.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