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어와 문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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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를 쓰지 말고 한글을 쓰자는 주장이 사회적 공감을 얻으면서 이제 모든 신문이 한글 전용에 가로 쓰기를 하고 있다. 신문 조판에서 한글보다 한자가 더 대접받던 시절이 불과 30여 년 전이다.*  한때 한자교육까지 폐지되었다가 다시 부활하긴 했지만, 우리말과 글로 의사전달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데 이론의 여지는 없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말과 글의 한계를 어디까지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론이 분분하다. 우리말과 글을 살리는 데  평생을 헌신한 이오덕 선생의 공로는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지만, 우리말과 글의 순수성에 집착한 나머지 지나친 면도 없지 않다고 본다.

한자말을 우리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순수주의다. 2천여 년 동안 한자어를 빌어 역사를 기록하고 생각을 주고받았으며,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쓰는 수많은 낱말들이 한자에 기초한 낱말들이다. ‘微笑(미소)’라는 한자말을 쓰지 말고 ‘방긋 웃음’으로 써야 한다는 주장은 언어를 이념의 틀에 가두는 것이다. ‘미소 띤 얼굴’과 ‘방긋 웃는 얼굴’이 주는 느낌은 다르다. ‘엷은 웃음 띤 얼굴’이라 표현해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우리말이 갖고 있는 3·4조 운율을 감안할 때 순 우리말만으로는 문장의 리듬을 살리기 힘든 경우가 많다.

우리말 ‘까닭’에 해당하는 한자말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理由(이유), 緣由(연유), 緣故(연고)…. 이오덕 선생은 이미 일상적으로 쓰이는 ‘이유’도 쓰지 말고 ‘까닭’으로 쓰기를 권하는데, 이는 말의 기본을 무시한 것이다. 일상에서 ‘까닭’보다 ‘이유’를 더 많이 쓰는 것은 무엇보다 발음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언어의 기본은 소리이기에, 소리가 쉽게 나는 쪽으로 언어는 발달하기 마련이다. 영어에서 자주 쓰이는 말일수록 불규칙 변화가 심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유’와 ‘까닭’ 중에 사라질 가능성이 더 높은 말은 ‘까닭’일 것이다. 까닭은 발음하기도 어렵지만, ‘까닭’만으로는 미묘한 뜻을 제대로 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때로는 ‘연유’, ‘연고’라는 낱말로 뜻을 더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다. ‘연고 없는 무덤’을 ‘까닭 없는 무덤’으로 표현해서는 뜻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만약 선생의 주장대로 순우리말만 남기고 한자어를 폐기한다면 언어와 사고가 매우 협소해질 것이다. 해상도가 떨어지는 언어로는 정치한 사고를 하기도,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기도 어렵다.

주제(主題)와 소재(素材)는 둘 다 글과 관련해서 쓰이는 개념어이지만 뜻이 아주 다르다. 한자어로 표기하면 의미가 보다 선명해진다. 우리글은 소리글자이지만 ‘제’와 ‘재’를 소리만으로 구분하기는 힘들다. 뜻글자인 한자의 경우 표제 제(題)와, 재료 재(材)를 알면 주제와 소재의 개념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제목(題目)과 재목(材木)이 소리가 같고 한글 모양새도 비슷하지만 의미가 전혀 다른 단어임을 금방 알 수 있다. 한자어 학습이 필요한 이유다.

이런 기본적인 개념어를 혼동하는 대학생들이 적지 않다. 낱말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고 어림짐작으로 알다 보면 맥락상 틀린 낱말을 쓰게 되고, 결과적으로 뜻이 전달되지 않는 문장을 쓰게 된다. 개념어를 정확히 알려면 한자를 알아야 한다. 한자를 몰라도 문장 속에서 다양한 용례를 접함으로써 뜻을 알 수는 있지만, 오랜 시간이 걸리고 정확한 개념을 잡기도 쉽지 않다. 우리말의 개념어들이 대부분 한자어이기 때문에 한자를 알아야 어휘력이 늘고, 개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요즘 영어 단어를 그대로 개념어로 쓰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마땅한 번역어가 없어서이기도 하고 지식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그러는 이들도 있지만, 한글 전용으로 말미암아 개념어 만들기가 힘들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할 것이다. 순우리말로는 개념어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신조어를 만들기도 쉽지 않다. 노트북, 레깅스처럼 대부분의 신조어들이 영어 그대로 쓰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표기만 한글일 뿐 영어식 낱말이 범람하고 있다. 만약 전화가 21세기에 들어왔다면 아마도 ‘텔레폰’ 또는 ‘폰’이라 쓰고 있지 않을까? 한글 전용 정책이 오히려 외래어 범람을 낳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뜻글자인 한자어의 장점은 조어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소리글자인 순우리말은 한자에 비해 조어 능력이 많이 떨어진다. 한자어 ‘학습’은 체험학습, 현장학습 식으로 합성어를 쉽게 만들 수 있는 데 비해 우리말 ‘배움’은 그러기가 쉽지 않다. 반면에 같은 소리글자인 영어는 뜻글자인 라틴어 어근을 활용해 un-learning, inter-net처럼 낱말을 쉽게 만들 수 있다. 순수 영어를 살리기 위해 라틴어 어근을 쓰지 말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없다.

한글 전용 문제는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까지 덧씌워지면서 언어 문제가 아닌 정치적 문제가 되고 있다. 한글학회는 “한자는 특권층의 반민주적 문자”라면서 한자교육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옛날에 그러했다고 해서 한자를 쓰지 말자는 것은 문해력을 하향평준화 하자는 것과 다름없다. 민주사회가 되었으니 특권층의 문자였던 한자를 민중도 쓸 수 있게 교육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 민중이 한자를 익히지 못할 정도로 몽매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반민주적인 사고가 아닐까?

한자는 익히기가 힘들고 시간도 너무 많이 든다지만 이 문제는 교육 방법을 개선하면 된다. 『마법 천자문』 같은 학습만화가 한자교육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바람 風(풍)처럼 한자를 익히는 데 그친다는 점이다. 풍습(風習), 풍속(風俗) 같은, 한자로 된 개념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한글로 개념어를 이해하려면 수많은 용례를 통해 익혀야 하지만, 한자를 알면 관련 단어 몇 개만으로도 의미를 알 수 있다. 굳이 쓰는 법까지 익히지 않아도 문해력에는 별 지장이 없다. 교육용 기초한자로 된 개념어를 읽기 중심으로 가르치면 된다. 한자어 낱말 끝말 잇기 놀이 같은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날 한자교육은 대체로 보수적인 교육자들이 지지하는 편이다. 2002년 역대 교육부장관 13명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초등학교 한자교육을 건의하면서 한자교육을 둘러싼 논쟁이 일기도 했다. 2008년에는 서울 강남구와 서초구가 관내 초등학교에서 한자교육을 실시하면서 또 한 차례 논란이 일었다. 2014년에는 ‘초등학교 한자교육 실시’가 국무회의를 통과하면서 한자교육 부활을 둘러싸고 논란이 격화되었는데,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현재 교육부는 어느 편도 들지 않는 입장이어서, 학교에 따라서는 자유재량 시간에 한자를 가르치는 학교도 있고 영어 공부를 더 하는 학교도 있다. 때문에 출신 학교에 따라 한자 능력에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사들은 한글 전용 세대여서 한자교육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다. 일상에서 한자를 거의 쓰지 않고 학교교육에서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아이들의 어휘력과 문해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전공서적을 읽어내지 못하는 대학생들이 많은 것도 개념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어도 한자식 표현은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리포트를 ‘금일까지 제출’하라는 말을 ‘금요일까지 제출’로 알아듣고는 왜 헷갈리는 표현을 쓰냐고 오히려 교수에게 따지는 학생이 있을 정도다.

한글 전용 세대의 문해력이 떨어지는 것은 역설적으로 한글이 너무 쉽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리글자인 한글은 혼자서도 익힐 수 있고, 한번 익히면 못 읽는 글자가 없다. 때문에 읽을 줄 아는 단어는 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생긴다. 한 번쯤 본 단어, 어렴풋이 아는 개념어를 아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의 문해력이 높은 까닭은 워낙에 독서 인구가 많기도 하지만, 일본어가 한글에 비해 어렵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고유 문자도 히라가나, 가타가나 두 가지가 있고, 한자를 섞어 쓸 뿐만 아니라 한자를 읽는 방식도 소리로 읽는 음독과 뜻으로 읽는 훈독이 따로 있다.

한문까지 익힐 필요는 없어도 상용한자**  정도는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한자로 된 개념어를 익혀야 한다. 수학의 경우 사칙연산을 모르면 방정식을 풀 수 없고, 방정식을 모르면 함수를 풀 수 없다. 수학적 언어는 알고 모르고가 분명해서 아는 척을 할 수 없는데 반해, 인문학 언어는 대충 알고도 아는 척할 수 있어 정작 자신이 뭘 모르는지를 모르는 사태가 생긴다. 방정식을 모르면 함수를 붙들고 있어봐야 시간낭비일 뿐이다. 실제로 많은 아이들이 그런 상태에 있다.

문해력의 기초부터 다져야 한다. 개념어를 정확히 이해하고 다양한 용례 속에서 그 낱말의 쓰임새를 알게 되면 맥락을 읽는 문해력과 사고력이 자란다. 디지털 문해력을 걱정하기 전에 어휘력부터 기를 일이다. 모르는 단어가 많이 나오면 맥락만으로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들어 점점 책을 멀리하게 된다. 한글은 알지만 긴 글을 읽어내지 못하는, 사실상의 문맹에 가까운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한글 전용 정책을 재고할 때다.

식물이 뿌리가 내리기까지는 성장이 멈춘 것처럼 보여도 뿌리가 튼튼하게 자리 잡으면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하지만 뿌리가 약하면 백날이 가도 시들시들하기 마련이다. 대안학교 출신 중에 수능 준비를 시작한 뒤 수학 기초가 안 되어 있다는 걸 깨닫고 중학교 수학부터 차근차근 공부한 친구는 일 년 만에 고등학교 수학까지 마칠 수 있었던 반면, 고등 수학을 계속 붙들고 있었던 아이는 결국 수학을 포기해야 했다. 돌아가는 길처럼 보이는 길이 지름길인 경우가 많다. 기본, 기초, 토대를 튼튼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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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5월 15일 한겨레신문 창간호가 최초의 한글 전용 가로쓰기 신문이었다. 모든 일간지가 한글 전용을 하게 된 것은 1995년 10월 9일 한글날부터다.

**  1951년 교육한자 1,000자를 정하고 1957년에 300자를 추가하여 1964년부터 학교에서 가르치다가 1970년 한글 전용 정책에 의해 폐지된 뒤 1972년에 다시 교육용 기초한자 1,800자를 제정하여 중고등 과정에서 가르치고 있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