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수가 아닌 수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1+2+3+…+97+98+99=?
재빠른 손놀림으로 주판알을 수백 번 튕겨 답을 알아낼 수도 있지만, 패턴을 찾아내면 간단한 암산으로 더 쉽고 빠르게 답을 구할 수 있다.
(1+99)+(2+98)+…+(49+51)+50=4950
서양의 과학기술이 동양을 앞지른 것은 동양인들이 산수에 치중한 데 반해 서양인들은 수학을 했기 때문이다. 수를 헤아리는 산수는 실용을 위한 것인 반면 수학은 원리와 법칙을 찾는 것이다. 일찍이 중앙집권 국가를 이룬 중국과 한국은 치수와 세금 징수에 필요한 계산법을 발달시킨 반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패턴을 찾아내고 그 원리를 응용하는 방법을 발달시켰다.
실용을 추구해온 동양은 원리를 탐구한 서양을 넘어설 수 없었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산술학과 대수학이 발달했지만 기하학에는 거의 관심이 없어 연역적 추론이 발달하지 못했다. 수학은 수와 도형의 세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패턴을 찾아내는 것이다. 원리를 탐구하는 수학과 과학의 기초 없이는 기술 발달에 한계가 있다. 원주율을 모르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수 없다.
일본의 세계적인 수학자 오카 기요시는 일찍이 수학의 본질이 ‘조화’이며, 학문의 중심은 ‘정서’에 있다고 말했다. 오카가 말하는 ‘정서’는 ‘만물 사이에서 오가는 마음이 개개인에게 스며든 것’을 일컫는다고 수학자 모리타 마사오는 해석한다. 만유의 연결성에 대한 자각이다. 수학적 직관력이 시적 감수성과 통한다는 이야기다. 수학자이자 교사인 폴 록하트가 ‘어느 수학자의 탄식’이란 글에서 수학이 예술과 본질적으로 통한다고 말한 것도 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삶과 동떨어진 (수학)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수학의 공식이나 정리를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게 하려고 애를 쓰기도 하지만, 그런 실용적인 접근이 수학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는 쉽지 않다. 자기소개서 같은 실용적인 글을 쓰기 위해 글쓰기를 배우는 것이 결코 글쓰기에 흥미를 갖게 하거나 글을 잘 쓸 수 있게 도와주지 못하는 것처럼. 실용적인 목적을 추구하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고, 깊이 파고들기가 어렵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적 관점은 쓸모를 중시하는 자세다. 하지만 쓸모만 추구해서는 정작 그 쓸모마저 제대로 챙길 수 없게 된다. 쓸모는 쓸모없는 것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학의 개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맥락 속에서 이해할 때 그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자유자재로 사고 실험을 할 수 있으려면 다양한 맥락 속에서 그 개념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도 낱말의 의미가 맥락 속에서 어떻게 미묘하게 변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운율 맞추는 재미를 알고 낱말들이 상호작용하면서 글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수와 도형으로 사고 놀이를 하면서 그 신비로움에 눈을 뜰 때 수학적 사고를 즐길 수 있다. 이는 예술적 직관과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패턴의 예술’이라 일컬어지는 수학은 실용적인 학문이라기보다 패턴으로 이루어진 세상의 신비를 엿보는 놀이 같은 것이다.
수학적 사고는 민주주의와도 연결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수학 및 예술과 더불어 민주주의가 함께 꽃피웠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서로 다른 것들을 연결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끈을 볼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음악은 음들 사이에 내재하는 조화와 질서를 추구한다. 그림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를 표현하고자 한다. 추상화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그렇게 존재하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를 포착해서 표현한다. 모든 학문과 예술은 숨어 있는 패턴을 찾아내고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귀납식 배움과 연역식 배움
실용적 접근은 단기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도구적 관점은 목적과 수단을 분리시키기 때문에 장기적인 에너지 조달이 힘들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나 중국처럼 20세기에 미국이 실용주의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대영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시대 역시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교육에서의 실용주의적 접근 역시 당장은 성과를 거둘 수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위험하다. 실용적 사고는 아이들 또한 부국강병이나 기업의 이윤 창출을 위한 도구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실용주의는 우리 교육 속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 미국 교육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가가 주도하는 근대교육의 바탕에는 아이들을 인적자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실용적 교육관이 깔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교육이 삶과 동떨어진 것은 현대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이 사실상 삶에 필요한 일상적인 활동과는 무관하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아이들을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여기며 삶과 동떨어진 교육을 해온 근대교육에 문제의식을 갖고 ‘삶의 교육’을 지향하는 대안교육은 또 다른 방향에서 실용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문화인류학자 김현경은 한 칼럼에서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다.
- 이른바 대안교육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교육기간을 줄여야 하고 교과과정을 더 실용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미적분 따위로 아이들을 괴롭히지 말고 농사나 목공이나 요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것이 일제가 조선인들에게 적당하다고 생각했던 교육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을까? 일제는 조선인은 수학이나 과학보다는 ‘실과’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과교육을 빙자하여 수업시간에도 텃밭을 가꾸게 했다. 조선인에게는 고등교육 기회를 주지 않은 반면, 일본인들에게는 아주 긴 교육과정, 수학과 과학에 대한 충분한 강조, 실용성보다는 사유와 논리의 발달에 초점을 맞춘 커리큘럼을 제공했다. (12년이면 충분할까?, 한겨레. 2017.2.15.)
‘하나같이’라는 표현은 지나친 일반화이긴 하지만 귀담아 들어야 할 비판이다. 대안교육 현장들은 흔히 의식주 자립을 강조하면서 실제적인 활동에 힘을 쏟는 데 비해 인지교육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면이 있다. ‘해보면서 배운다’는 존 듀이의 교육철학이나 그를 잇는 진보주의 교육론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바보 만들기』에서 존 테일러 개토가 말했듯이, 자동차 팬벨트도 갈아 끼울 줄 모르면서 피타고라스 정리를 아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많은 교사들이 갖고 있다.
‘삶의 교육’을 추구하는 대안학교들의 경우, 입시교육의 대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실제적인 활동 중심의 교육과정이 늘어나고 감수성을 기르는 문화예술 활동에 더 힘을 쏟는 경향이 있다. 인지교육에서도 수학·과학 분야는 문학·사회·철학 영역의 교과보다 경시되는 편이다. 입시교육을 터부시하는 문화로 인해 많은 대안학교에서 지성을 벼리는 교육에 힘을 쏟지 못해온 것이 사실이다.
아이들이 공부의 즐거움을 알고 지성을 기르도록 이끌지 못한 것은 자유주의 교육의 한계이기도 했다. 20세기의 자유주의 교육 또는 진보주의 교육이 지식교육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것은 존 듀이 교육론의 영향도 있지만, 근대학교의 주입식 지식교육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교사중심의 주입식 교육에 시달리던 아이들에게 아동중심, 경험중심 교육은 유효한 처방이기도 했다.
사실 실용주의 교육의 주창자로 알려진 존 듀이는 경험을 통해 배우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되며, 거기서 더 나아가 행위의 결과와 원인을 연결 짓는 인식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학교교육을 통해 경험과 인식의 조화를 실현하기에는 표준화 교육에 근거한 근대학교의 교육체계가 맞지 않았다. 대안학교 역시 체계적인 지식교육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의욕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배움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일만도 벅찼던 셈이다.
배움은 경험과 인식의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연금술 같은 것이다. 언어를 습득할 때처럼, 처음에는 해보면서 배우지만 원리를 깨우치면 하나를 배우고 열을 알게 된다. 진짜 배움은 그런 것이다. 해보면서 배우는 것이 귀납식 배움이라면, 하나를 통해 열을 아는 것은 연역식 배움이다. 수학은 연역적 사고를 훈련하는 데 가장 적합한 학문이다. 학교의 수학교육이 문제풀이로 일관하면서 많은 아이들이 수학에 넌덜머리를 내게 만드는 것은 사실상 아이들의 지성을 좀먹는 일이다.
수학과 과학은 기술 발달에 기여하지만, 그 본령은 비실용성이다.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고, 모순된 것들을 아우르는 법칙을 찾아내는 그 일은 우주의 신비를 들여다보고 싶은 근원적인 욕망이 빚어내는 놀이에 가깝다. 예술 또한 그저 놀이로, 또는 궁극의 아름다움을 구현하고자 하는 열정이 빚어내는 것이다. 철학과 문학은 모순된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인문학의 토대를 이룬다. 모든 학문과 예술은 근원에서 통한다. 교육은 그 세계를 얼핏이나마 엿보게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
현병호 (민들레 발행인)
* 이 글은 격월간 민들레 132호에 실린 글의 일부입니다.
산수가 아닌 수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1+2+3+…+97+98+99=?
재빠른 손놀림으로 주판알을 수백 번 튕겨 답을 알아낼 수도 있지만, 패턴을 찾아내면 간단한 암산으로 더 쉽고 빠르게 답을 구할 수 있다.
(1+99)+(2+98)+…+(49+51)+50=4950
서양의 과학기술이 동양을 앞지른 것은 동양인들이 산수에 치중한 데 반해 서양인들은 수학을 했기 때문이다. 수를 헤아리는 산수는 실용을 위한 것인 반면 수학은 원리와 법칙을 찾는 것이다. 일찍이 중앙집권 국가를 이룬 중국과 한국은 치수와 세금 징수에 필요한 계산법을 발달시킨 반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패턴을 찾아내고 그 원리를 응용하는 방법을 발달시켰다.
실용을 추구해온 동양은 원리를 탐구한 서양을 넘어설 수 없었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산술학과 대수학이 발달했지만 기하학에는 거의 관심이 없어 연역적 추론이 발달하지 못했다. 수학은 수와 도형의 세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패턴을 찾아내는 것이다. 원리를 탐구하는 수학과 과학의 기초 없이는 기술 발달에 한계가 있다. 원주율을 모르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수 없다.
일본의 세계적인 수학자 오카 기요시는 일찍이 수학의 본질이 ‘조화’이며, 학문의 중심은 ‘정서’에 있다고 말했다. 오카가 말하는 ‘정서’는 ‘만물 사이에서 오가는 마음이 개개인에게 스며든 것’을 일컫는다고 수학자 모리타 마사오는 해석한다. 만유의 연결성에 대한 자각이다. 수학적 직관력이 시적 감수성과 통한다는 이야기다. 수학자이자 교사인 폴 록하트가 ‘어느 수학자의 탄식’이란 글에서 수학이 예술과 본질적으로 통한다고 말한 것도 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삶과 동떨어진 (수학)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수학의 공식이나 정리를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게 하려고 애를 쓰기도 하지만, 그런 실용적인 접근이 수학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는 쉽지 않다. 자기소개서 같은 실용적인 글을 쓰기 위해 글쓰기를 배우는 것이 결코 글쓰기에 흥미를 갖게 하거나 글을 잘 쓸 수 있게 도와주지 못하는 것처럼. 실용적인 목적을 추구하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고, 깊이 파고들기가 어렵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적 관점은 쓸모를 중시하는 자세다. 하지만 쓸모만 추구해서는 정작 그 쓸모마저 제대로 챙길 수 없게 된다. 쓸모는 쓸모없는 것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학의 개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맥락 속에서 이해할 때 그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자유자재로 사고 실험을 할 수 있으려면 다양한 맥락 속에서 그 개념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도 낱말의 의미가 맥락 속에서 어떻게 미묘하게 변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운율 맞추는 재미를 알고 낱말들이 상호작용하면서 글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수와 도형으로 사고 놀이를 하면서 그 신비로움에 눈을 뜰 때 수학적 사고를 즐길 수 있다. 이는 예술적 직관과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패턴의 예술’이라 일컬어지는 수학은 실용적인 학문이라기보다 패턴으로 이루어진 세상의 신비를 엿보는 놀이 같은 것이다.
수학적 사고는 민주주의와도 연결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수학 및 예술과 더불어 민주주의가 함께 꽃피웠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서로 다른 것들을 연결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끈을 볼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음악은 음들 사이에 내재하는 조화와 질서를 추구한다. 그림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를 표현하고자 한다. 추상화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그렇게 존재하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를 포착해서 표현한다. 모든 학문과 예술은 숨어 있는 패턴을 찾아내고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귀납식 배움과 연역식 배움
실용적 접근은 단기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도구적 관점은 목적과 수단을 분리시키기 때문에 장기적인 에너지 조달이 힘들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나 중국처럼 20세기에 미국이 실용주의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대영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시대 역시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교육에서의 실용주의적 접근 역시 당장은 성과를 거둘 수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위험하다. 실용적 사고는 아이들 또한 부국강병이나 기업의 이윤 창출을 위한 도구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실용주의는 우리 교육 속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 미국 교육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가가 주도하는 근대교육의 바탕에는 아이들을 인적자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실용적 교육관이 깔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교육이 삶과 동떨어진 것은 현대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이 사실상 삶에 필요한 일상적인 활동과는 무관하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아이들을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여기며 삶과 동떨어진 교육을 해온 근대교육에 문제의식을 갖고 ‘삶의 교육’을 지향하는 대안교육은 또 다른 방향에서 실용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문화인류학자 김현경은 한 칼럼에서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같이’라는 표현은 지나친 일반화이긴 하지만 귀담아 들어야 할 비판이다. 대안교육 현장들은 흔히 의식주 자립을 강조하면서 실제적인 활동에 힘을 쏟는 데 비해 인지교육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면이 있다. ‘해보면서 배운다’는 존 듀이의 교육철학이나 그를 잇는 진보주의 교육론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바보 만들기』에서 존 테일러 개토가 말했듯이, 자동차 팬벨트도 갈아 끼울 줄 모르면서 피타고라스 정리를 아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많은 교사들이 갖고 있다.
‘삶의 교육’을 추구하는 대안학교들의 경우, 입시교육의 대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실제적인 활동 중심의 교육과정이 늘어나고 감수성을 기르는 문화예술 활동에 더 힘을 쏟는 경향이 있다. 인지교육에서도 수학·과학 분야는 문학·사회·철학 영역의 교과보다 경시되는 편이다. 입시교육을 터부시하는 문화로 인해 많은 대안학교에서 지성을 벼리는 교육에 힘을 쏟지 못해온 것이 사실이다.
아이들이 공부의 즐거움을 알고 지성을 기르도록 이끌지 못한 것은 자유주의 교육의 한계이기도 했다. 20세기의 자유주의 교육 또는 진보주의 교육이 지식교육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것은 존 듀이 교육론의 영향도 있지만, 근대학교의 주입식 지식교육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교사중심의 주입식 교육에 시달리던 아이들에게 아동중심, 경험중심 교육은 유효한 처방이기도 했다.
사실 실용주의 교육의 주창자로 알려진 존 듀이는 경험을 통해 배우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되며, 거기서 더 나아가 행위의 결과와 원인을 연결 짓는 인식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학교교육을 통해 경험과 인식의 조화를 실현하기에는 표준화 교육에 근거한 근대학교의 교육체계가 맞지 않았다. 대안학교 역시 체계적인 지식교육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의욕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배움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일만도 벅찼던 셈이다.
배움은 경험과 인식의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연금술 같은 것이다. 언어를 습득할 때처럼, 처음에는 해보면서 배우지만 원리를 깨우치면 하나를 배우고 열을 알게 된다. 진짜 배움은 그런 것이다. 해보면서 배우는 것이 귀납식 배움이라면, 하나를 통해 열을 아는 것은 연역식 배움이다. 수학은 연역적 사고를 훈련하는 데 가장 적합한 학문이다. 학교의 수학교육이 문제풀이로 일관하면서 많은 아이들이 수학에 넌덜머리를 내게 만드는 것은 사실상 아이들의 지성을 좀먹는 일이다.
수학과 과학은 기술 발달에 기여하지만, 그 본령은 비실용성이다.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고, 모순된 것들을 아우르는 법칙을 찾아내는 그 일은 우주의 신비를 들여다보고 싶은 근원적인 욕망이 빚어내는 놀이에 가깝다. 예술 또한 그저 놀이로, 또는 궁극의 아름다움을 구현하고자 하는 열정이 빚어내는 것이다. 철학과 문학은 모순된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인문학의 토대를 이룬다. 모든 학문과 예술은 근원에서 통한다. 교육은 그 세계를 얼핏이나마 엿보게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
현병호 (민들레 발행인)
* 이 글은 격월간 민들레 132호에 실린 글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