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리가 아니라 물리가 결정한다
십여 년 전부터 심리학 관련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대형서점에는 눈에 띄는 자리에 관련 서적 매대가 놓이기 시작했다. ‘치유’가 화두가 되는 시대, 인간의 보편성보다 개인성에 주목하는 시대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흐름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노력과 심리로 문제 해결에 접근하는 것은 문제를 왜곡시키고 책임을 당사자에게 지우기 십상이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개인의 ‘노오력’을 강조하면서 사회문제를 비켜가듯이.
연습을 하고 또 하면 누구나 뛰어난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는 ‘1만 시간의 법칙’도 무작정 노력하면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적절한 피드백을 줄 수 있는 교사와 함께 체계적인 훈련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받쳐줄 때 가능하다는 얘기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 문제라는 말이다. 게다가 노력으로 선천적 재능을 따라잡기는 힘들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실력에서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음악·스포츠 20퍼센트 안팎, 학교성적의 경우 4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개인의 성취에서도 심리보다 물리가 우선한다는 얘기다. 동기부여도 환경이 받쳐줘야 된다.
현실을 냉정하게 들여다보자. 한때 심심찮게 신문지상을 장식하던 개천 출신 용들은 심리가 물리를 이길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지만, ‘하면 된다’는 구호가 횡행하던 그 시절에도 아무 개천에서나 용이 나오지는 않았다. 가난해도 자식에게 헌신하는 부모, 두뇌와 재능을 타고난 자녀, 운 등 여러 환경이 맞아떨어졌을 때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 용들의 실체 또한 대개는 기득권에 봉사하는 하수인이 되는 것이었지만, 그나마 그런 용들도 점점 보기 힘들어진 것은 환경이 변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재력 있는 조부모와 정보에 밝은 부모, 재능을 겸비한 아이들이 명문대 입시도 싹쓸이하는 세상이다.
심리로 물리를 이기려는 사람들은 흔히 『아큐정전』의 아큐처럼 정신승리법을 시전하는 것으로 끝난다. 서구의 물리력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서글픈 이야기다. 하지만 루쉰 같은 이들이 있었기에 중국은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재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신력으로 물리력을 이길 수는 없지만, 정신이 살아 있으면 와신상담하며 물리력을 기를 수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중국과 한국이 해온 일이다. 머지않아 물리적으로 서구와 일본을 압도하는 날이 오면 중국은 그들에게 아편전쟁과 난징대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될 것이다. 오늘날 한일 갈등 역시 근본에서는 물리력의 싸움이다. 한국의 GDP가 일본을 앞설 때까지는 일본사회에서 혐한은 사라지지 않고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일부 깨어 있는 시민들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 페미니즘이 사회 전면에 대두한 것도 여성들의 경제력과 사회적 영향력이 남성에 뒤지지 않게 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리적 배경 없이 ‘정치적 올바름’ 만으로 통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득권 남성들의 저항 또한 물리적 현상이다. 자신이 누리는 권력을 잃게 될 위기의식을 느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저항하기 마련이다. 사회 변화에 저항하는 백래시 현상은 인권이나 평등 같은 이념만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검찰개혁, 언론개혁 또한 검찰과 언론인 개개인의 성찰이나 자정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 카르텔을 무너뜨릴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가능한 일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촛불혁명과 총선을 거쳐 공수처 설치 등으로 물리적 환경을 하나하나 바꾸어가는 중이다. 저항 역시 만만찮다. 당위성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의료개혁 또한 의사들의 윤리의식 함양이 아니라 공공의료를 확충하고 의사 수를 늘임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기득권을 순순히 포기하는 집단은 없다. 가뭄에 콩 나듯 그런 개인들이 등장하지만 그 세계에서 왕따를 면치 못한다.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이 의미하는 것
케이크 하나를 두 아이에게 나눠줘야 할 때 가장 효율적이면서 공평한 방법은 무엇일까? 엄마가 공평하게 잘라서 반씩 나눠주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한 아이에게는 케이크를 자르게 하고, 다른 아이에게는 우선선택권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 자르는 아이는 최대한 공평하게 나누어야 자기 몫을 지킬 수 있게 되고, 우선선택권을 갖는 아이 역시 만족할 수 있다.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최대한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의 원리다.
1989년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종 거래에 관한 국제 협약’이 발효되었음에도 상아는 여전히 주요 밀거래 대상이었고 밀렵도 계속되었다.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군벌들이 지배하는 부족연합체에 가까워서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곳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코끼리 사냥과 상아 거래를 엄격하게 금지한 케냐와 탄자니아에서는 코끼리 개체 수가 더 줄어든 반면, 상아 거래는 금지했지만 코끼리 사냥은 허용한 짐바브웨와 남아공에서는 오히려 코끼리 수가 급증했다. 소유지 내에서 일정 기간에 정해진 개체 수만 사냥을 허용한다는 단서를 달자 각 지역 군벌들이 스스로 소유지 내의 코끼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한 때문이다.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은 공공자원이 개인들의 자율에 맡겨질 경우 일어나는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commons)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공익과 사익이 서로 충돌하지 않게 하면서 그 사안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민간 주체들이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만드는 것이다. 정보를 충분히 갖고 있지 않은 정책 입안자가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민간 주체들을 상대로 게임을 설계할 때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이 이론은 2007년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코끼리를 보호하는 일은 동물에 대한 사랑이나 생태주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과학적 지식과 정치적 역량이 요구되는 일이다. 가치지향적인 시민단체 마인드로는 한계가 있다. 인간에 대한 냉철한 이해와 사회적 역학 관계에 대한 지식, 전략적 마인드가 필요하다. 형제들 사이에서 케이크를 나누는 문제라면 형제애로 풀 수도 있겠지만,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문제는 개인의 선한 마음이나 공동체성에 기대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문제는 심리학이 아니라 사회과학과 물리학이 작동하는 영역이다.
진정성이나 정신력으로 어찌해보려는 것은 한계가 명백하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을 수도 있지만, 그만한 물리적 시간이 요구된다. 축구도 정신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체력이 받쳐줘야 된다. 박항서가 베트남 대표팀을 맡고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식단을 바꾸는 것이었다. 물리적 해법으로 접근한 것이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사람으로 아이들을 기르고자 한다면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도와야 한다. 교육이 개인의 성취나 자립 능력을 기르는 데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 역할에는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 각각의 전문 분야 일도 있지만 사회의 매커니즘을 설계하는 일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 인류사회가 지향하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제도를 만들고 정책을 시행할 수 있으려면 인문학적 통찰력과 사회과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고시 공부만 해서는 그런 능력을 기를 수 없다. 우리 사회의 인재 양성과 등용 방식을 근본적으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취업학원이 되다시피 한 대학과 지금의 고시 제도로는 공동체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인재를 기대하긴 힘들다.
엘리트 교육과 시민 교육
국가운영을 책임질 수 있는 엘리트를 길러내는 일은 예로부터 고등교육의 역할이었다. 조선시대 인재 등용 방식에는 나름 합리적인 면이 있었다. 경세제민을 위해 실무는 중인계급의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지배계급은 사회와 인간을 이해하는 시야를 기르는 공부를 했다. 양반 자제들을 교육하는 성균관, 서원 같은 고등교육기관의 역할이었다. 역할이 신분으로 고착되면서 혁신의 에너지가 만들어지지 못한 것이 한계로 작용했지만,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5백 년에 걸친 왕조가 가능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한편 일제시대에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고등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읽기와 셈하기 정도만 배울 수 있었다. 고등교육이라 해도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실무자를 기르는 교육에 그쳤다. 반면 일본의 자국민 엘리트들에게는 수학과 과학, 철학과 인문학 등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했다. 독자적인 사유 능력을 갖춘 엘리트를 기르고자 한 것이다. 일본이 일찍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17세기부터 ‘난학’이 융성하면서 수학과 과학의 토대를 닦은 덕분이다.(일본의 난학자들은 네덜란드와 직접 교류하면서 유클리드 기하학 원론을 비롯해 해부학 서적 등 다양한 학술서들을 직접 번역 출판했다.)
시험 잘 보는 엘리트가 아닌, 독자적인 사유 능력을 갖춘 엘리트를 기르는 교육은 어떻게 가능할까? 수학 국제올림피아드에서 1등을 해도 수학을 즐길 줄 모르면 수학자가 되기는 힘들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청소년들은 수학 올림피아드에서는 세계 1, 2위를 다투지만 수학을 좋아하는지를 묻는 설문에서는 아니라는 답변이 우세하다. “한국에서 수학 올림피아드 우승자는 나올 수 있어도 훌륭한 수학자는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한 외국 수학자의 말은 뼈아픈 진실을 담고 있다.
이것은 학교교육의 문제만은 아니다. 학교 교육과정이란 어디나 비슷해서 미국의 학교라고 수학을 즐기는 교육을 하는 것은 아니다. 조기유학생들의 이야기로는 미국의 수학교육 역시 문제풀이에 치중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여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수포자(수학포기자)가 되고, 아주 소수의 학생들만 수학탐구자가 되는 것 같다고 한다. 표준화된 학교교육은 비슷하지만 탐구자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커리큘럼 때문이 아니라 성적에 대한 압박이 적고 자유로운 탐구가 가능한 사회 분위기 덕분일 것이다.
문제풀이에 능숙한 아이보다 소수(素數)의 신비를 곱씹으며 수를 갖고 놀 줄 아는 아이가 창의적인 수학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모두가 수학자가 될 필요는 없으며, 소수 따위는 몰라도 좋은 삶을 살 수 있지만, 그런 아이들이 나올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 수학 공부가 그렇듯이 맥락 속에서 사고할 줄 알 때 독창적인 사유를 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것들 사이에서 연결지점을 발견하는 능력이 창의력의 핵심이다. 그런 창의성을 발휘하는 학생은 드물겠지만, 그렇게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은 모든 아이들에게 필요하다. 이는 커리큘럼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수많은 낙오자들과 소수의 문제풀이 기계를 길러내는 지금의 학교교육을 개혁하는 길은 커리큘럼의 개선에 있지 않다. 8차 교육과정이 나온들 달라지긴 힘들 것이다. 진짜 엘리트는 길러내지 못하고 기껏 고시생과 대기업의 머슴들 그리고 대량의 낙오자를 양산하는 교육문제의 뿌리는 공교육의 근본 방향이 시민교육을 지향하고 있지 않은 데 있다. 입시교육이 아니라 시민을 기르는 교육을 지향할 때 소모적인 입시경쟁도 완화되고, 아이들이 뭔가에 몰입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겨나고, 그 속에서 다양한 인재들이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국가수준 교육이 부모들의 욕망에 부응하며 입시에 올인하는 것은 아이들만 그르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앞날도 그르치는 일이다. 교육철학부터 바로 세우고, 물리적 환경을 하나하나 바꿔나가야 한다. 개인의 성취를 위해 고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 자신이 기여할 바를 찾아 공무를 담당하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날 때, 안전한 직장으로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교사의 길을 택하는 이들이 늘어날 때, 선순환의 에너지가 만들어지고 사회도 진보할 수 있다. 다들 기득권 집단이 되어 안주해버리면 사회는 정체되고 퇴행하기 마련이다. 교육의 역할은 사회를 진보시키는 것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심리가 아니라 물리가 결정한다
십여 년 전부터 심리학 관련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대형서점에는 눈에 띄는 자리에 관련 서적 매대가 놓이기 시작했다. ‘치유’가 화두가 되는 시대, 인간의 보편성보다 개인성에 주목하는 시대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흐름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노력과 심리로 문제 해결에 접근하는 것은 문제를 왜곡시키고 책임을 당사자에게 지우기 십상이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개인의 ‘노오력’을 강조하면서 사회문제를 비켜가듯이.
연습을 하고 또 하면 누구나 뛰어난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는 ‘1만 시간의 법칙’도 무작정 노력하면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적절한 피드백을 줄 수 있는 교사와 함께 체계적인 훈련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받쳐줄 때 가능하다는 얘기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 문제라는 말이다. 게다가 노력으로 선천적 재능을 따라잡기는 힘들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실력에서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음악·스포츠 20퍼센트 안팎, 학교성적의 경우 4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개인의 성취에서도 심리보다 물리가 우선한다는 얘기다. 동기부여도 환경이 받쳐줘야 된다.
현실을 냉정하게 들여다보자. 한때 심심찮게 신문지상을 장식하던 개천 출신 용들은 심리가 물리를 이길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지만, ‘하면 된다’는 구호가 횡행하던 그 시절에도 아무 개천에서나 용이 나오지는 않았다. 가난해도 자식에게 헌신하는 부모, 두뇌와 재능을 타고난 자녀, 운 등 여러 환경이 맞아떨어졌을 때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 용들의 실체 또한 대개는 기득권에 봉사하는 하수인이 되는 것이었지만, 그나마 그런 용들도 점점 보기 힘들어진 것은 환경이 변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재력 있는 조부모와 정보에 밝은 부모, 재능을 겸비한 아이들이 명문대 입시도 싹쓸이하는 세상이다.
심리로 물리를 이기려는 사람들은 흔히 『아큐정전』의 아큐처럼 정신승리법을 시전하는 것으로 끝난다. 서구의 물리력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서글픈 이야기다. 하지만 루쉰 같은 이들이 있었기에 중국은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재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신력으로 물리력을 이길 수는 없지만, 정신이 살아 있으면 와신상담하며 물리력을 기를 수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중국과 한국이 해온 일이다. 머지않아 물리적으로 서구와 일본을 압도하는 날이 오면 중국은 그들에게 아편전쟁과 난징대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될 것이다. 오늘날 한일 갈등 역시 근본에서는 물리력의 싸움이다. 한국의 GDP가 일본을 앞설 때까지는 일본사회에서 혐한은 사라지지 않고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일부 깨어 있는 시민들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 페미니즘이 사회 전면에 대두한 것도 여성들의 경제력과 사회적 영향력이 남성에 뒤지지 않게 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리적 배경 없이 ‘정치적 올바름’ 만으로 통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득권 남성들의 저항 또한 물리적 현상이다. 자신이 누리는 권력을 잃게 될 위기의식을 느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저항하기 마련이다. 사회 변화에 저항하는 백래시 현상은 인권이나 평등 같은 이념만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검찰개혁, 언론개혁 또한 검찰과 언론인 개개인의 성찰이나 자정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 카르텔을 무너뜨릴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가능한 일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촛불혁명과 총선을 거쳐 공수처 설치 등으로 물리적 환경을 하나하나 바꾸어가는 중이다. 저항 역시 만만찮다. 당위성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의료개혁 또한 의사들의 윤리의식 함양이 아니라 공공의료를 확충하고 의사 수를 늘임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기득권을 순순히 포기하는 집단은 없다. 가뭄에 콩 나듯 그런 개인들이 등장하지만 그 세계에서 왕따를 면치 못한다.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이 의미하는 것
케이크 하나를 두 아이에게 나눠줘야 할 때 가장 효율적이면서 공평한 방법은 무엇일까? 엄마가 공평하게 잘라서 반씩 나눠주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한 아이에게는 케이크를 자르게 하고, 다른 아이에게는 우선선택권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 자르는 아이는 최대한 공평하게 나누어야 자기 몫을 지킬 수 있게 되고, 우선선택권을 갖는 아이 역시 만족할 수 있다.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최대한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의 원리다.
1989년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종 거래에 관한 국제 협약’이 발효되었음에도 상아는 여전히 주요 밀거래 대상이었고 밀렵도 계속되었다.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군벌들이 지배하는 부족연합체에 가까워서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곳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코끼리 사냥과 상아 거래를 엄격하게 금지한 케냐와 탄자니아에서는 코끼리 개체 수가 더 줄어든 반면, 상아 거래는 금지했지만 코끼리 사냥은 허용한 짐바브웨와 남아공에서는 오히려 코끼리 수가 급증했다. 소유지 내에서 일정 기간에 정해진 개체 수만 사냥을 허용한다는 단서를 달자 각 지역 군벌들이 스스로 소유지 내의 코끼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한 때문이다.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은 공공자원이 개인들의 자율에 맡겨질 경우 일어나는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commons)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공익과 사익이 서로 충돌하지 않게 하면서 그 사안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민간 주체들이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만드는 것이다. 정보를 충분히 갖고 있지 않은 정책 입안자가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민간 주체들을 상대로 게임을 설계할 때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이 이론은 2007년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코끼리를 보호하는 일은 동물에 대한 사랑이나 생태주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과학적 지식과 정치적 역량이 요구되는 일이다. 가치지향적인 시민단체 마인드로는 한계가 있다. 인간에 대한 냉철한 이해와 사회적 역학 관계에 대한 지식, 전략적 마인드가 필요하다. 형제들 사이에서 케이크를 나누는 문제라면 형제애로 풀 수도 있겠지만,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문제는 개인의 선한 마음이나 공동체성에 기대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문제는 심리학이 아니라 사회과학과 물리학이 작동하는 영역이다.
진정성이나 정신력으로 어찌해보려는 것은 한계가 명백하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을 수도 있지만, 그만한 물리적 시간이 요구된다. 축구도 정신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체력이 받쳐줘야 된다. 박항서가 베트남 대표팀을 맡고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식단을 바꾸는 것이었다. 물리적 해법으로 접근한 것이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사람으로 아이들을 기르고자 한다면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도와야 한다. 교육이 개인의 성취나 자립 능력을 기르는 데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 역할에는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 각각의 전문 분야 일도 있지만 사회의 매커니즘을 설계하는 일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 인류사회가 지향하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제도를 만들고 정책을 시행할 수 있으려면 인문학적 통찰력과 사회과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고시 공부만 해서는 그런 능력을 기를 수 없다. 우리 사회의 인재 양성과 등용 방식을 근본적으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취업학원이 되다시피 한 대학과 지금의 고시 제도로는 공동체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인재를 기대하긴 힘들다.
엘리트 교육과 시민 교육
국가운영을 책임질 수 있는 엘리트를 길러내는 일은 예로부터 고등교육의 역할이었다. 조선시대 인재 등용 방식에는 나름 합리적인 면이 있었다. 경세제민을 위해 실무는 중인계급의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지배계급은 사회와 인간을 이해하는 시야를 기르는 공부를 했다. 양반 자제들을 교육하는 성균관, 서원 같은 고등교육기관의 역할이었다. 역할이 신분으로 고착되면서 혁신의 에너지가 만들어지지 못한 것이 한계로 작용했지만,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5백 년에 걸친 왕조가 가능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한편 일제시대에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고등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읽기와 셈하기 정도만 배울 수 있었다. 고등교육이라 해도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실무자를 기르는 교육에 그쳤다. 반면 일본의 자국민 엘리트들에게는 수학과 과학, 철학과 인문학 등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했다. 독자적인 사유 능력을 갖춘 엘리트를 기르고자 한 것이다. 일본이 일찍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17세기부터 ‘난학’이 융성하면서 수학과 과학의 토대를 닦은 덕분이다.(일본의 난학자들은 네덜란드와 직접 교류하면서 유클리드 기하학 원론을 비롯해 해부학 서적 등 다양한 학술서들을 직접 번역 출판했다.)
시험 잘 보는 엘리트가 아닌, 독자적인 사유 능력을 갖춘 엘리트를 기르는 교육은 어떻게 가능할까? 수학 국제올림피아드에서 1등을 해도 수학을 즐길 줄 모르면 수학자가 되기는 힘들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청소년들은 수학 올림피아드에서는 세계 1, 2위를 다투지만 수학을 좋아하는지를 묻는 설문에서는 아니라는 답변이 우세하다. “한국에서 수학 올림피아드 우승자는 나올 수 있어도 훌륭한 수학자는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한 외국 수학자의 말은 뼈아픈 진실을 담고 있다.
이것은 학교교육의 문제만은 아니다. 학교 교육과정이란 어디나 비슷해서 미국의 학교라고 수학을 즐기는 교육을 하는 것은 아니다. 조기유학생들의 이야기로는 미국의 수학교육 역시 문제풀이에 치중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여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수포자(수학포기자)가 되고, 아주 소수의 학생들만 수학탐구자가 되는 것 같다고 한다. 표준화된 학교교육은 비슷하지만 탐구자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커리큘럼 때문이 아니라 성적에 대한 압박이 적고 자유로운 탐구가 가능한 사회 분위기 덕분일 것이다.
문제풀이에 능숙한 아이보다 소수(素數)의 신비를 곱씹으며 수를 갖고 놀 줄 아는 아이가 창의적인 수학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모두가 수학자가 될 필요는 없으며, 소수 따위는 몰라도 좋은 삶을 살 수 있지만, 그런 아이들이 나올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 수학 공부가 그렇듯이 맥락 속에서 사고할 줄 알 때 독창적인 사유를 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것들 사이에서 연결지점을 발견하는 능력이 창의력의 핵심이다. 그런 창의성을 발휘하는 학생은 드물겠지만, 그렇게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은 모든 아이들에게 필요하다. 이는 커리큘럼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수많은 낙오자들과 소수의 문제풀이 기계를 길러내는 지금의 학교교육을 개혁하는 길은 커리큘럼의 개선에 있지 않다. 8차 교육과정이 나온들 달라지긴 힘들 것이다. 진짜 엘리트는 길러내지 못하고 기껏 고시생과 대기업의 머슴들 그리고 대량의 낙오자를 양산하는 교육문제의 뿌리는 공교육의 근본 방향이 시민교육을 지향하고 있지 않은 데 있다. 입시교육이 아니라 시민을 기르는 교육을 지향할 때 소모적인 입시경쟁도 완화되고, 아이들이 뭔가에 몰입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겨나고, 그 속에서 다양한 인재들이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국가수준 교육이 부모들의 욕망에 부응하며 입시에 올인하는 것은 아이들만 그르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앞날도 그르치는 일이다. 교육철학부터 바로 세우고, 물리적 환경을 하나하나 바꿔나가야 한다. 개인의 성취를 위해 고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 자신이 기여할 바를 찾아 공무를 담당하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날 때, 안전한 직장으로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교사의 길을 택하는 이들이 늘어날 때, 선순환의 에너지가 만들어지고 사회도 진보할 수 있다. 다들 기득권 집단이 되어 안주해버리면 사회는 정체되고 퇴행하기 마련이다. 교육의 역할은 사회를 진보시키는 것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