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배움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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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과 학습은 어떻게 다른가

 

학교교육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흔히 삶에서 배우는 것이 진짜 배움이고 학교에서 책으로 지식을 배우는 것은 진정한 배움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학습’보다 ‘배움’이란 말을 선호하는 것도 이와 관련 있을 것이다. ‘교육’은 선호 대상이 아니라 기피 대상에 가깝다. 교육과잉 시대를 지나오면서 생겨난 과잉반응일까? 홈스쿨링을 옹호하는 글 중에 ‘배움? 좋지, 교육? 그건 아냐’ 같은 제목의 글도 있다. 마치 배움과 교육이 서로를 배척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과연 그럴까? 교육과 배움 그리고 학습은 어떤 관계일까?

배움과 학습은 동의어처럼 쓰이기도 하지만 미묘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흔히 학습은 지적 배움의 경우에 쓰이고, 배움은 좀더 폭넓은 의미로 쓰인다. 배움은 순 우리말인 반면 학습은 한자어로,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배우고 때로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學以時習之不亦說乎)”에서 나온 용어다. 엄밀히 해석하면 학습은 배우고(學) 익히는(習) 과정을 아우르는 말이다. 학(學)이 구체적 사실과 경험을 통한 배움이라면 습(習)은 이를 자기 것으로 소화하여 개념적 지식을 형성하는 단계, 또는 체화하는 단계라 할 수 있다.

뇌기반 교육을 연구하는 주디 윌리스(Judy Willis)는 학습에서 패턴을 탐색할 때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구체적 차원에서의 이해 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추상적 수준으로 확장된 이해 활동이다. 또 하나는 비유적 차원까지 확장된 이해 활동이다. 구체적 사실들을 통한 귀납적 이해에서 개념을 통한 연역적 이해로 나아간다. 하나하나 해보면서 배우는 과정을 거쳐 하나를 통해 열을 아는 연역적 배움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비유적 차원의 이해는 응용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언어를 다른 맥락으로 비틀어 유머를 구사할 줄 아는 단계다.

사칙연산 학습을 예로 들자면, 첫 번째 차원은 구체적 지식을 습득하는 단계로, 문제를 통해 연산을 해보는 것이다. 다음은 개념을 이해하는 차원이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 개념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더하기와 곱하기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나눗셈은 곱셈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 단계에서는 한 개념이 다른 개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하는 데까지 사고가 확장된다. 나누기2 대신 곱하기1/2을 할 줄 아는 단계다. 우리나라 학교교육에서 패턴을 탐색하는 학습은 대개 첫 번째 차원에 머물러 있고 개념을 이해하는 차원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세 번째 차원은 비유적 용법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단계다. 또는 모순된 개념을 아우르는 변증법적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음수를 곱하면 양수가 되는 원리, 피타고라스 정리를 통해 사칙연산이 기하의 세계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이해하는 단계다. 언어의 중의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도 이 단계에서 가능하다. 이를테면 우리말 ‘나누다’는 ‘편을 나누다’처럼 ‘갈라서다’의 뜻으로도 쓰이지만, ‘음식을 나누다’처럼 ‘함께하다’의 뜻으로도 쓰인다. 한 낱말이 정반대의 뜻으로 쓰이는 경우는 종종 있다. 나누는 것이 곧 함께하는 것이 되는 이 차원은 초등 단계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학습의 과정을 간단히 정리하면 귀납적 지식을 연역적 지식으로 변환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패턴을 인식하고 그것을 복제하는 일이다. 언어의 패턴을 인식하는 것이 배움이라면 그 패턴을 다양한 맥락에서 구사하는 과정이 익힘의 과정이다. 모든 아이들이 그 과정을 거쳐 모국어를 습득한다. 배움이 음식을 먹는 일이라면 익힘은 음식을 소화하는 과정에 해당한다. ‘먹는다’는 말이 소화시킨다는 의미까지 포함할 수 있지만, 익힘의 과정이 특히 중요한 경우도 있다. 악기 연주 같은 기예는 익힘의 과정 없이는 숙달할 수 없다. 소화 과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때 음식이 피와 살이 된다.


교육이 배움을 방해할까

 

교실이 ‘배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일본의 교육학자 사토 마나부가 주창한 학교개혁론인데, 일본사회보다 한국사회에서 더 주목을 받고 있다. 교사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모둠학습을 통해 스스로 배우는 교실을 지향한다. 교사는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도와주는 사람이다. 학생들이 수업의 주체가 되게 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가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자극한다. 교사의 일방적인 강의식 수업에 대한 문제제기이자 대안으로서, 교육보다 배움에 방점을 찍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강의식 수업은 교사 한 사람이 수십 명, 수백 명에게 어떤 지식을 전수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학생 개개인의 이해도 차이에 따라 배움의 정도가 다르지만, 그 격차를 좁힐 수 있는 방법을 병행한다면 강의식 수업을 학교교육에서 포기할 필요는 없다.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데는 주입식 교육이나 암기가 효과적인 면이 있다. 가르침과 배움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어느 한쪽을 배제할 경우 반편 교육 또는 반편 배움이 되기 십상이다. 교사의 도움 없이 독서와 토론을 통해 아이들 스스로 배우기도 하지만, 그 배움의 질을 담보하기는 힘들다.

표준화에 근거한 근대 학교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진보적 교육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맞는 교육을 추구한다. 이른바 학습자중심의 맞춤식 교육이다. 하지만 이런 개별화 교육은 방법론이어야 하지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보편성을 지향하면서 개별성을 배려해야 한다. 반대로 개인의 특성을 배려하고 살리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고 그것을 보편적인 교육과정으로 달성하려드는 것은 마차를 말 앞에 매다는 격이다. 오늘날 혁신교육이 자칫 그런 방향으로 흐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강의식 수업이나 표준화 교육의 단점이 많지만 개인 맞춤형 교육이 곧 대안은 아니다. 공교육 체제 안에서 시도하기에는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들고, 비용 대비 효과 면에서도 그다지 권할 만한 방식은 아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맞는 학교를 지향하더라도 강의식 수업이나 표준화 교육의 장점을 폐기할 필요는 없다. 강의식 수업과 모둠 학습 또는 개별 학습을 적절히 조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교과 학습과 동아리 활동의 적절한 조화도 필요하다. ‘배움의 공동체’에도 교육은 필요하다.

개인 맞춤형 학습을 추구하는 홈스쿨링이 아이들의 성취도를 높이지만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바람직한 대안일지에 대해서는 좀더 장기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팀플레이 역량을 기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집단이나 한 사회의 역량은 개개인의 역량보다 팀플레이 역량이 결정한다. 개인의 성취도를 우선시하고, 상대평가제의 내신등급으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을 부추기는 것은 사회 전체의 역량을 떨어트린다. ‘배움의 공동체’에서 시도하는 모둠학습은 팀플레이 역량을 기르는 데 적합한 학습방식이다.

교육은 이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성취나 자립 능력을 기르는 것을 넘어,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사람으로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 교육이자 교사의 역할이다. 교육보다 배움을 강조하면서 교사들이 아이들 뒤로 물러나는 자세를 취한 것이 교육과잉 시대를 지나오면서 나타난 반작용이었다면, 이제는 다시금 교육과 교사의 역할을 고민해볼 시기다. ‘배움의 도’에서 주장하듯 무위의 교육이 언제나 좋은 교육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