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움-학습-공부
배움, 학습, 공부는 어떻게 다른가? 배움은 대체로 가르치는 사람을 전제로 하는 말로, 실제 인물이든 책속의 인물이든 누군가로부터 뭔가를 배우는 것이다. 학습은 배우고(學) 익히는(習) 과정을 아우르는 말이다. 공부는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도 할 수 있다. 익힘 과정은 주로 혼자 하는 활동이다. ‘혼자 이 악물고 하는 공부’에서 공부를 배움으로 대치하면 어색하다. 학습 방식이 다양하고, 배움과 익힘 과정을 명확히 나누기가 어려우므로 언어의 경계를 명확히 하기는 힘들다.
배움은 우연한 계기로 저절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학습이나 공부는 작정하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목적지향적인 활동이다. 그래서 학습노동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일하면서 배우고 놀면서 배우기도 하지만 공부는 그러기가 힘들다. 주경야독처럼 밭을 다 갈고 나서 책을 읽지, 밭을 갈면서 책을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책상머리 공부는 주로 뇌의 활동이어서 에너지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기가 힘들고 지속적인 에너지 조달도 어렵다. 수학자나 과학자들이 몰입 상태에서 하는 활동은 공부가 아니라 연구 활동이다. 목표가 있지만, 연구 활동 자체에서 생겨나는 에너지가 있다.
공부처럼 목표지향적인 활동은 쉽게 지친다. 공부가 힘든 이유다. 어떤 목표에 이르기 위한 공부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 글의 제목을 학습론, 배움론이 아닌 공부론이라 한 것은 목표지향적인 공부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전개하기 위함이다. 공부는 폭넓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흔히 공부를 못한다, 잘한다 할 때의 공부의 의미에 한정해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아이들이 하는 공부에 대해, 그리고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어른들에게 필요한 공부에 대해 짚어본다.
동기가 아닌 습관의 힘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할 때 흔히 동기부여가 안 되어 그렇다고 말한다. 왜 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안 한다는 논리다. 목표가 뚜렷하고 의지가 굳으면 누구나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과연 그럴까?
동기부여가 목표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가짐이라면 그 마음의 에너지는 오래 가기 힘들다. 굳은 결심도 흔히 작심삼일이 되는 까닭은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 행위에는 에너지 조달이 힘들기 때문이다. 행위와 목적은 서로 긴밀하게 엮여 있지 않다. 민족이나 민중을 ‘위하는’ 행동이 쉽게 변질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에너지는 관성이든 중력이든 ‘의하여’ 작동하지 ‘위하여’ 작동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마감 시한에 가까워서야 글을 쓰기 시작해 탈고를 하게 되는 것도 ‘위하여’ 에너지보다 ‘의하여’ 에너지가 사람을 움직인다는 것을 말해준다. 마감의 힘이 아니면 많은 작가들이 탈고를 못할 것이다.
공부를 꾸준히 하려면 동기의 힘보다 습관의 힘을 빌 필요가 있다. 습관은 관성의 힘을 생성해서 공부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준다.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자리 잡고 공부를 함으로써 몸과 뇌가 그 패턴에 적응하여 저절로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습관이 들면 목표지향적인 ‘위하여’ 공부가 습관에 의한 ‘의하여’ 공부로 바뀐다. 에너지 조달이 수월해지는 것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문을 담당했던,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강원국 작가는 글쓰기의 요령으로 ‘루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도 첫 문장을 쓰는 일은 막막한 법이다. 그는 아침 산책을 하고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는 것을 정해진 의식 행하듯 하다 보면 여하튼 글이 써진다고 말한다. 뇌가 ‘이젠 꼼짝없이 글을 써야 하는구나’ 하고 인식하게 만드는 과정이란다. 말하자면 몸의 힘을 빌어 뇌를 길들이는 방법이다. 동기나 목적의식보다 습관의 힘이 더 세다.
습관은 뇌가 몸의 말을 듣게 만드는 과정이다. 마라토너가 어느 시점에서 느끼게 된다는 러너스-하이 같은 상태는 뇌가 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뇌를 통제하는 단계다. 무아지경에 가까운 몰입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운동이든 악기 연주든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럴 때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해온 몸은 자체의 지성을 갖추고 있다. 40년 넘게 합기도를 수련해온 우치다 타츠루는 이를 신체지(身體智)라 명명한다. 뇌를 거치지 않고 몸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다.
습관 들이기는 익힘의 과정이기도 하다. 습관(習慣)은 뭔가를 하고 또 해서 관성의 힘이 작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배운(學) 것을 틈틈이 익히는(習) 것이 학습의 요체이듯, 좋은 마음과 태도를 몸에 배게 하는 것은 교육의 핵심이기도 하다. 학습과 교육에서 습의 중요성을 모르는 이는 없겠지만, 좋은 습을 들이는 일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습은 몸을 통하지 않고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라기보다 몸으로 하는 것이다. 결국 ‘습 들이기’야말로 학습을 포함한 교육의 전반을 관통하는 과제일 것이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는 말
‘공부에 때가 있다’는 말은 오랜 경험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뇌과학적으로도 이는 맞는 말이다. 읽기 학습은 인지과정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5-6세 이후에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이전에는 몸놀이로 균형 잡힌 성장을 도모하고 책을 읽기보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상력을 키우는 것이 나중에 지적 성장 면에서도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전두엽이 가장 왕성하게 발달하는 점을 고려하면 본격적인 인지학습은 그즈음 시작하는 것이 적절하다.
아이들의 발달단계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다. 보편교육인 공교육은 인간의 보편적인 발달과정에 따라 학습 내용과 방식을 구성한다. 초등 4학년 때부터 수학에서 도형을 공부하는 것도 추상적 사고력이 발달하는 시기에 맞춘 것이다. 수천 년에 걸친 인류의 경험과 지난 몇백 년 동안의 과학적 연구는 인간의 학습 능력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발달단계를 건너뛸 수 없듯이 공부의 중간 단계를 건너뛸 수 없다. 수학 같은 경우는 특히 그렇다. 사칙연산을 모르는 상태로 방정식을 이해할 수 없고, 방정식을 모르면 함수를 이해할 수 없다.
흔히 ‘공부에 때가 있다’라는 말은 주로 나이와 관련해서 하는 말이다. 사회활동을 시작할 나이가 되면 공부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생계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시기에 공부를 해야 한다. 학문을 하고자 한다면 공부의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만학도가 학문의 세계에서 성공하기란 힘들다. 서머힐에서는 12살에 읽기를 시작해 문학박사가 된 사례가 있지만, 이는 만학도가 아니라 배움에 발동이 늦게 걸린 경우라고 봐야 한다.
모든 학습의 기초는 문해력이다. 수학조차도 문해력이 필요하다. 시험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폭넓은 독서를 통해 문해력과 상식을 습득하고, 영어로 된 자료를 자유롭게 검색할 수 있는 정도의 외국어 실력을 갖추면 공부의 기초는 마련된 셈이다. 대학에서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을 공부할 계획이면 수학의 기본 개념도 알아두어야 한다. 이런 공부는 문제풀이식 공부를 하지 않고도 재미있게 할 수 있다. 아이들이 공부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해야 한다. 교사는 아이들이 타고나는 호기심과 배움의 열정을 꺼트리지 않고 인류가 쌓아온 지식과 한발짝 한발짝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
문해력은 책을 읽다 보면 저절로 생겨난다. 요즘 아이들은 텍스트보다 영상에 더 친숙한 세대이지만, 영상만으로 문해력을 기르기는 힘들다. 문해력은 대체로 독서량에 비례하지만 속독으로 많은 책을 빨리 읽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속독 기술을 익혀 기계적으로 속독하는 것과 전문 분야 지식이 충분하고 문해력이 뛰어난 사람이 글의 흐름을 훑으면서 필요한 부분만 정독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많은 책을 건성건성 읽기보다 좋은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이 문해력 향상에 더 도움이 된다.
문해력의 핵심은 행간을 읽고 맥락을 읽어내는 것이다. 낱말과 낱말의 사이, 문장과 문장의 사이, 문단과 문단의 사이에 진짜 정보가 담겨 있다. 하지만 어휘력이 부족하면 문해력을 기를 수 없다. 한 문장에 모르는 단어가 두 개 이상 나오면 맥락만으로 의미를 짐작하기가 어려워 글을 계속 읽어나가기가 힘들다. 사전을 뒤지며 한 문장 한 문장 이해해나갈 수도 있지만, 이어지는 문장마다 그런 작업을 해야 한다면 뇌의 작업기억이 인지과부하 상태에 빠져 쉽게 지치고 학습의욕을 잃게 된다. 어휘력, 기초 지식, 기본 개념이 중요한 이유다.
표준화 시험의 장벽을 넘어서기
오늘날 진보주의 교육의 비판 대상이 되고 있는 표준화 시험은 사실 평등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20세기 진보주의 교육의 산물이다. 미국에서는 유색인종 학생 등에 대한 평가자의 주관이 개입하지 않도록 20세기 중반부터 객관식 시험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험이 학생의 역량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기에 부적절하고 평등과 공정성의 가치를 담보하기에도 적절치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21세기 들어 미국에서도 대입에서 SAT 비중이 대폭 줄어들고 학생부 종합전형 방식으로 바뀌었다. 한국 사회에서 수능 비중이 줄어든 것도 비슷한 이유다.
그럼에도 인지능력 평가에 효율적인 표준화 시험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수능시험 문제는 단순한 암기 지식을 묻기보다 사고력을 테스트하는 문제들이 많다. 실제로 대학에서의 수학(受學) 능력을 테스트하는 시험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수능시험이 아니라 시험문제 풀이에 올인하는 학교교육에 있다. 학교교육이 그렇게 변질되는 이유는 수능점수가 여전히 대입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학력에 따른 직업 선택 기회의 차이, 임금 차이가 개선되지 않는 한 입시문화는 달라지기 힘들 것이다.
입시제도를 바꾸려는 시도는 꾸준히 시도되어왔다. 논술과 수시제도가 등장하면서 수능점수의 영향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긴 했다.(현재의 대입제도는 정시, 수시, 논술 세 트랙으로 이루어져 있어 각자 유리한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고등학생들은 내신을 위해서도 시험공부에 올인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책 한 권 읽지 못하고 국어시험 문제만 죽어라 푼 아이들, 수학적 사고력을 기르지 못하고 문제풀이 요령만 익힌 아이들이 대학에서 실력을 발휘하기란 힘들다. 한국 대학의 수준이 세계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기업들은 역량 있는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자체적인 선발과 평가제도를 시행한다. 인사위원이나 상급자의 판단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도 않는다. 평가에서 밀려났다고 해서 부모가 항의하는 일도 없다. 간혹 미운털이 박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런 변수로 인해 인재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기업 스스로 보완책을 강구하기 마련이다. 대학 역시 자체적으로 역량 있는 학생을 선발하고 졸업생들을 평가하는 시스템을 갖추게 하는 것이 사회의 역량을 높이는 길이다.
현재의 대입제도에서 시험공부에 힘을 쏟지 않는 대안학교 학생들의 경우 대학에 진학하려면 수시나 논술을 통한 길을 모색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서머힐 학생들은 2년만 작정하고 입시 준비를 하면 웬만한 대학에 갈 수 있다지만, 그들의 경우는 영어라는 난이도 높은 과목의 부담이 없다. 독서량이 많아 문해력과 기초 상식을 갖추고 있으면 초중고 과정을 따라잡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대학입시에서 영어와 수학 두 가지 장벽을 2년 만에 넘어서기란 쉽지 않다.
대안학교에서 여러 모로 뛰어난 역량을 보이는 학생도 시험공부를 시작하면 열패감에 시달리곤 한다. 십 년이 넘도록 한 번도 시험을 본 적이 없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입시는 문해력만으로는 힘들다. 책을 많이 읽은 아이들도 시험문제 푸는 요령이 부족해 시간 배분을 잘 못하기도 한다. 학습의 세계에서도 입시는 나름의 기술을 요하는 특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시험공부만 할 필요는 없지만 시험을 보고자 한다면 시험기술을 익힐 필요가 있다. 홈스쿨러나 비인가 대안학교 학생들의 경우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검정고시를 거쳐야 하므로 시험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기도 하다.(검정고시의 경우 난이도가 낮아 전 과목 만점을 받아야 내신 1등급에 준하는 성적이 된다. 하지만 과목별 재시험이 가능해 전 과목 만점을 받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표준화의 압력이 지나치게 높아지면서 많은 부작용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이들의 개별적인 특성을 고려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과 개인 수준의 교육과정을 조율하는 지혜를 발휘할 때다. 플립러닝flipped learning*이나 ‘배움의 공동체’는 표준화 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고유성을 살리고자 하는 시도다. 수업 방식만이 아니라 평가제도도 바꿔야 한다. 객관식 시험에 의한 상대평가 제도를 고집하게 되는 것은 교사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초기에 시행착오와 부작용이 따르더라도 신뢰에 기초한 평가 시스템을 만들어가야 할 시점이다.
* 플립러닝flipped learning : ‘거꾸로 교실’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집에서 과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미리 내준 학습자료로 집에서 공부를 하고 학교에 와서 실습과 과제를 하는 방식이다. 교실에서 학생 중심의 수업이 가능한 장점이 있는 반면 가정형편에 따른 학습 격차가 커지는 단점이 있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배움-학습-공부
배움, 학습, 공부는 어떻게 다른가? 배움은 대체로 가르치는 사람을 전제로 하는 말로, 실제 인물이든 책속의 인물이든 누군가로부터 뭔가를 배우는 것이다. 학습은 배우고(學) 익히는(習) 과정을 아우르는 말이다. 공부는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도 할 수 있다. 익힘 과정은 주로 혼자 하는 활동이다. ‘혼자 이 악물고 하는 공부’에서 공부를 배움으로 대치하면 어색하다. 학습 방식이 다양하고, 배움과 익힘 과정을 명확히 나누기가 어려우므로 언어의 경계를 명확히 하기는 힘들다.
배움은 우연한 계기로 저절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학습이나 공부는 작정하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목적지향적인 활동이다. 그래서 학습노동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일하면서 배우고 놀면서 배우기도 하지만 공부는 그러기가 힘들다. 주경야독처럼 밭을 다 갈고 나서 책을 읽지, 밭을 갈면서 책을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책상머리 공부는 주로 뇌의 활동이어서 에너지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기가 힘들고 지속적인 에너지 조달도 어렵다. 수학자나 과학자들이 몰입 상태에서 하는 활동은 공부가 아니라 연구 활동이다. 목표가 있지만, 연구 활동 자체에서 생겨나는 에너지가 있다.
공부처럼 목표지향적인 활동은 쉽게 지친다. 공부가 힘든 이유다. 어떤 목표에 이르기 위한 공부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 글의 제목을 학습론, 배움론이 아닌 공부론이라 한 것은 목표지향적인 공부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전개하기 위함이다. 공부는 폭넓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흔히 공부를 못한다, 잘한다 할 때의 공부의 의미에 한정해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아이들이 하는 공부에 대해, 그리고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어른들에게 필요한 공부에 대해 짚어본다.
동기가 아닌 습관의 힘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할 때 흔히 동기부여가 안 되어 그렇다고 말한다. 왜 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안 한다는 논리다. 목표가 뚜렷하고 의지가 굳으면 누구나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과연 그럴까?
동기부여가 목표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가짐이라면 그 마음의 에너지는 오래 가기 힘들다. 굳은 결심도 흔히 작심삼일이 되는 까닭은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 행위에는 에너지 조달이 힘들기 때문이다. 행위와 목적은 서로 긴밀하게 엮여 있지 않다. 민족이나 민중을 ‘위하는’ 행동이 쉽게 변질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에너지는 관성이든 중력이든 ‘의하여’ 작동하지 ‘위하여’ 작동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마감 시한에 가까워서야 글을 쓰기 시작해 탈고를 하게 되는 것도 ‘위하여’ 에너지보다 ‘의하여’ 에너지가 사람을 움직인다는 것을 말해준다. 마감의 힘이 아니면 많은 작가들이 탈고를 못할 것이다.
공부를 꾸준히 하려면 동기의 힘보다 습관의 힘을 빌 필요가 있다. 습관은 관성의 힘을 생성해서 공부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준다.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자리 잡고 공부를 함으로써 몸과 뇌가 그 패턴에 적응하여 저절로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습관이 들면 목표지향적인 ‘위하여’ 공부가 습관에 의한 ‘의하여’ 공부로 바뀐다. 에너지 조달이 수월해지는 것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문을 담당했던,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강원국 작가는 글쓰기의 요령으로 ‘루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도 첫 문장을 쓰는 일은 막막한 법이다. 그는 아침 산책을 하고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는 것을 정해진 의식 행하듯 하다 보면 여하튼 글이 써진다고 말한다. 뇌가 ‘이젠 꼼짝없이 글을 써야 하는구나’ 하고 인식하게 만드는 과정이란다. 말하자면 몸의 힘을 빌어 뇌를 길들이는 방법이다. 동기나 목적의식보다 습관의 힘이 더 세다.
습관은 뇌가 몸의 말을 듣게 만드는 과정이다. 마라토너가 어느 시점에서 느끼게 된다는 러너스-하이 같은 상태는 뇌가 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뇌를 통제하는 단계다. 무아지경에 가까운 몰입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운동이든 악기 연주든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럴 때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해온 몸은 자체의 지성을 갖추고 있다. 40년 넘게 합기도를 수련해온 우치다 타츠루는 이를 신체지(身體智)라 명명한다. 뇌를 거치지 않고 몸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다.
습관 들이기는 익힘의 과정이기도 하다. 습관(習慣)은 뭔가를 하고 또 해서 관성의 힘이 작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배운(學) 것을 틈틈이 익히는(習) 것이 학습의 요체이듯, 좋은 마음과 태도를 몸에 배게 하는 것은 교육의 핵심이기도 하다. 학습과 교육에서 습의 중요성을 모르는 이는 없겠지만, 좋은 습을 들이는 일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습은 몸을 통하지 않고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라기보다 몸으로 하는 것이다. 결국 ‘습 들이기’야말로 학습을 포함한 교육의 전반을 관통하는 과제일 것이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는 말
‘공부에 때가 있다’는 말은 오랜 경험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뇌과학적으로도 이는 맞는 말이다. 읽기 학습은 인지과정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5-6세 이후에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이전에는 몸놀이로 균형 잡힌 성장을 도모하고 책을 읽기보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상력을 키우는 것이 나중에 지적 성장 면에서도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전두엽이 가장 왕성하게 발달하는 점을 고려하면 본격적인 인지학습은 그즈음 시작하는 것이 적절하다.
아이들의 발달단계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다. 보편교육인 공교육은 인간의 보편적인 발달과정에 따라 학습 내용과 방식을 구성한다. 초등 4학년 때부터 수학에서 도형을 공부하는 것도 추상적 사고력이 발달하는 시기에 맞춘 것이다. 수천 년에 걸친 인류의 경험과 지난 몇백 년 동안의 과학적 연구는 인간의 학습 능력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발달단계를 건너뛸 수 없듯이 공부의 중간 단계를 건너뛸 수 없다. 수학 같은 경우는 특히 그렇다. 사칙연산을 모르는 상태로 방정식을 이해할 수 없고, 방정식을 모르면 함수를 이해할 수 없다.
흔히 ‘공부에 때가 있다’라는 말은 주로 나이와 관련해서 하는 말이다. 사회활동을 시작할 나이가 되면 공부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생계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시기에 공부를 해야 한다. 학문을 하고자 한다면 공부의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만학도가 학문의 세계에서 성공하기란 힘들다. 서머힐에서는 12살에 읽기를 시작해 문학박사가 된 사례가 있지만, 이는 만학도가 아니라 배움에 발동이 늦게 걸린 경우라고 봐야 한다.
모든 학습의 기초는 문해력이다. 수학조차도 문해력이 필요하다. 시험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폭넓은 독서를 통해 문해력과 상식을 습득하고, 영어로 된 자료를 자유롭게 검색할 수 있는 정도의 외국어 실력을 갖추면 공부의 기초는 마련된 셈이다. 대학에서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을 공부할 계획이면 수학의 기본 개념도 알아두어야 한다. 이런 공부는 문제풀이식 공부를 하지 않고도 재미있게 할 수 있다. 아이들이 공부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해야 한다. 교사는 아이들이 타고나는 호기심과 배움의 열정을 꺼트리지 않고 인류가 쌓아온 지식과 한발짝 한발짝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
문해력은 책을 읽다 보면 저절로 생겨난다. 요즘 아이들은 텍스트보다 영상에 더 친숙한 세대이지만, 영상만으로 문해력을 기르기는 힘들다. 문해력은 대체로 독서량에 비례하지만 속독으로 많은 책을 빨리 읽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속독 기술을 익혀 기계적으로 속독하는 것과 전문 분야 지식이 충분하고 문해력이 뛰어난 사람이 글의 흐름을 훑으면서 필요한 부분만 정독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많은 책을 건성건성 읽기보다 좋은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이 문해력 향상에 더 도움이 된다.
문해력의 핵심은 행간을 읽고 맥락을 읽어내는 것이다. 낱말과 낱말의 사이, 문장과 문장의 사이, 문단과 문단의 사이에 진짜 정보가 담겨 있다. 하지만 어휘력이 부족하면 문해력을 기를 수 없다. 한 문장에 모르는 단어가 두 개 이상 나오면 맥락만으로 의미를 짐작하기가 어려워 글을 계속 읽어나가기가 힘들다. 사전을 뒤지며 한 문장 한 문장 이해해나갈 수도 있지만, 이어지는 문장마다 그런 작업을 해야 한다면 뇌의 작업기억이 인지과부하 상태에 빠져 쉽게 지치고 학습의욕을 잃게 된다. 어휘력, 기초 지식, 기본 개념이 중요한 이유다.
표준화 시험의 장벽을 넘어서기
오늘날 진보주의 교육의 비판 대상이 되고 있는 표준화 시험은 사실 평등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20세기 진보주의 교육의 산물이다. 미국에서는 유색인종 학생 등에 대한 평가자의 주관이 개입하지 않도록 20세기 중반부터 객관식 시험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험이 학생의 역량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기에 부적절하고 평등과 공정성의 가치를 담보하기에도 적절치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21세기 들어 미국에서도 대입에서 SAT 비중이 대폭 줄어들고 학생부 종합전형 방식으로 바뀌었다. 한국 사회에서 수능 비중이 줄어든 것도 비슷한 이유다.
그럼에도 인지능력 평가에 효율적인 표준화 시험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수능시험 문제는 단순한 암기 지식을 묻기보다 사고력을 테스트하는 문제들이 많다. 실제로 대학에서의 수학(受學) 능력을 테스트하는 시험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수능시험이 아니라 시험문제 풀이에 올인하는 학교교육에 있다. 학교교육이 그렇게 변질되는 이유는 수능점수가 여전히 대입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학력에 따른 직업 선택 기회의 차이, 임금 차이가 개선되지 않는 한 입시문화는 달라지기 힘들 것이다.
입시제도를 바꾸려는 시도는 꾸준히 시도되어왔다. 논술과 수시제도가 등장하면서 수능점수의 영향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긴 했다.(현재의 대입제도는 정시, 수시, 논술 세 트랙으로 이루어져 있어 각자 유리한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고등학생들은 내신을 위해서도 시험공부에 올인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책 한 권 읽지 못하고 국어시험 문제만 죽어라 푼 아이들, 수학적 사고력을 기르지 못하고 문제풀이 요령만 익힌 아이들이 대학에서 실력을 발휘하기란 힘들다. 한국 대학의 수준이 세계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기업들은 역량 있는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자체적인 선발과 평가제도를 시행한다. 인사위원이나 상급자의 판단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도 않는다. 평가에서 밀려났다고 해서 부모가 항의하는 일도 없다. 간혹 미운털이 박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런 변수로 인해 인재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기업 스스로 보완책을 강구하기 마련이다. 대학 역시 자체적으로 역량 있는 학생을 선발하고 졸업생들을 평가하는 시스템을 갖추게 하는 것이 사회의 역량을 높이는 길이다.
현재의 대입제도에서 시험공부에 힘을 쏟지 않는 대안학교 학생들의 경우 대학에 진학하려면 수시나 논술을 통한 길을 모색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서머힐 학생들은 2년만 작정하고 입시 준비를 하면 웬만한 대학에 갈 수 있다지만, 그들의 경우는 영어라는 난이도 높은 과목의 부담이 없다. 독서량이 많아 문해력과 기초 상식을 갖추고 있으면 초중고 과정을 따라잡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대학입시에서 영어와 수학 두 가지 장벽을 2년 만에 넘어서기란 쉽지 않다.
대안학교에서 여러 모로 뛰어난 역량을 보이는 학생도 시험공부를 시작하면 열패감에 시달리곤 한다. 십 년이 넘도록 한 번도 시험을 본 적이 없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입시는 문해력만으로는 힘들다. 책을 많이 읽은 아이들도 시험문제 푸는 요령이 부족해 시간 배분을 잘 못하기도 한다. 학습의 세계에서도 입시는 나름의 기술을 요하는 특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시험공부만 할 필요는 없지만 시험을 보고자 한다면 시험기술을 익힐 필요가 있다. 홈스쿨러나 비인가 대안학교 학생들의 경우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검정고시를 거쳐야 하므로 시험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기도 하다.(검정고시의 경우 난이도가 낮아 전 과목 만점을 받아야 내신 1등급에 준하는 성적이 된다. 하지만 과목별 재시험이 가능해 전 과목 만점을 받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표준화의 압력이 지나치게 높아지면서 많은 부작용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이들의 개별적인 특성을 고려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과 개인 수준의 교육과정을 조율하는 지혜를 발휘할 때다. 플립러닝flipped learning*이나 ‘배움의 공동체’는 표준화 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고유성을 살리고자 하는 시도다. 수업 방식만이 아니라 평가제도도 바꿔야 한다. 객관식 시험에 의한 상대평가 제도를 고집하게 되는 것은 교사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초기에 시행착오와 부작용이 따르더라도 신뢰에 기초한 평가 시스템을 만들어가야 할 시점이다.
* 플립러닝flipped learning : ‘거꾸로 교실’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집에서 과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미리 내준 학습자료로 집에서 공부를 하고 학교에 와서 실습과 과제를 하는 방식이다. 교실에서 학생 중심의 수업이 가능한 장점이 있는 반면 가정형편에 따른 학습 격차가 커지는 단점이 있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