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David Flaherty
읽지 못하는 아이
교사 시절, 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독서 수업을 하는데, 아무리 쉽고 얇은 책을 정해주어도 도무지 읽어오지 않는 그의 태도를 나는 ‘불성실함’으로만 여겼다. ‘고얀 놈!’ 싶어서 붙잡고 늘어지자 아이는 난독증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정확히는 “글이라고 생긴 건 한 줄도 못 읽어요”라고 했다. 한글을 모르는 건 아닌데 글자들이 붙어 있으면 이상하게 제멋대로 흩어져 의미 파악이 안 된다는 것이다. 태어나서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니. 내색은 안 했지만 약간 충격을 받은 내게 아이는, 친구들도 모르고 심지어 엄마 아빠도 모르는 사실이니 비밀로 해달라고 거듭 당부를 했다. 읽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살면서 무언가 읽을 일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읽을 수 없는 것들을 읽는 척하며 살아온 아이의 인생에 짠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 마음 저 깊은 곳에선 ‘내 반드시 너를 읽게 하리라!’ 하는 교육적 사명감이 불끈 솟아올랐다. ‘읽혀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동분서주했다. 방학 동안 난독증에 관한 책을 읽고, 독서치료 연수와 그림책 수업을 찾아다니고, 뇌과학 강의도 들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메모를 하며 난독증 탈출을 위한 특급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글을 읽지 못하면 지적 소양이 결핍될 것도 걱정이었지만, 그 아이가 영영 ‘읽는 기쁨’을 모르고 살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다.
어린 시절, 일찌감치 혼자 글을 터득한 나는 글자만 보면 달려들어 읽어댔다. 어쩔 수 없이 엄마는 빠듯한 형편에도 각종 전집과 백과사전을 한쪽 벽에 빽빽히 꽂힐 만큼 사주셨다. 그래도 늘 읽을 것이 귀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읽고 또 읽다 싫증이 나면 정육점에서 돼지고기를 살 때 둘둘 말아준 신문지를 손바닥으로 펴가며 읽었다. 나중엔 아버지가 정기 구독하던 <월간 새농민>까지 독파했다. ‘파종’이나 ‘제초’ 같은 어려운 단어가 나오면 국어사전과 백과사전을 뒤져보면서 탐험하듯 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해가 저문 줄도 모르고 컴컴해진 방 안에서 손가락으로 밑줄을 짚어가며 책을 읽던 기억이 생생하다. 스토리에 몰입해 때때로 차오르던 감동의 순간,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쁨! 그 빛나는 시간들이 이 아이의 인생에는 없다니, 너무 안타까웠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사회적 학습 능력’의 핵심인 ‘독서’를 하지 못하고 캄캄하게 살아갈 아이의 인생이 실로 걱정되었다.
그 안에 담긴 내용뿐 아니라 책이라는 물성이 주는 정서적 안도감, 한 손에 그러쥐었을 때의 그 단단한 만족감이나 바스락거리며 책장이 넘어갈 때의 설렘은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었다. 그걸 모르고 살아가는 건 불행한 삶이라고까지 생각하던 그 시절의 나는, 아이를 반드시 읽도록 만들겠노라 여러 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독서량과 시민의식은 비례할까
방학 동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새 학기가 시작되자 아이와 나는 다른 사람들 모르게 ‘읽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뇌도 근육처럼 지속적으로 쓰는 곳이 단련된다는 뇌 가소성에 따라, 일주일에 세 번 만나 읽기 연습을 하기로 했다. 책은 보기만 해도 울렁증이 생긴다기에, 대신 읽고 싶은 것을 골라 오라 했다. 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록 밴드에 관한 기사 몇 장을 내가 알려준 대로 자간을 넓게 조정해서 출력해왔다. 다행히 아이는 문자를 해석하면서 동시에 그 뜻을 파악하는 것만 어려워했지, 비슷한 단어를 듣고도 구분하지 못하는 청각적 난독증이나 글씨를 쓰는 데 어려움이 있는 운동 난독증은 없었다.
그런데 딱 일주일 후, 아이가 풀 죽은 표정으로 그만하면 안 되냐고 물었다. 올 것이 왔구나, 이렇게 쉽게 포기할 거냐고 으름장을 놓으려 던 나는 “차라리 온종일 밭에서 김을 매는 게 낫겠어요”라는 말에 멈칫했다. 제 나름으로는 다른 아이들이 가장 힘들어하고 싫어하는 ‘밭 에서 종일 김 매는 일’에 견주며 자신에게 읽는 행위가 얼마나 힘든지를 호소한 것이다. 조금만 더 참고 해보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꿀꺽 삼켰다. 아이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너를 위해 황금 같은 여름방학을 바쳤건만’ 하는 서운한 마음이 올라왔지만 생각해보면 그 또한 결국 내가 좋아서 혼자 분주했던 날들이었다.
곰곰이 상황을 돌이켜보니 “읽을 수 있으면 좋죠” 정도였던 아이의 반응이, 의욕이 앞선 내겐 “저 너무나 읽고 싶어요”로 들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이는 읽지 못하는 삶이 부끄럽긴 했으나, 읽지 않아도 살아갈 만했던 것이다. 글을 읽느니 차라리 밭일을 하겠다고 한 건 읽기에 대한 절박함도 없었거니와,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몸으로 하는 일에 자신 있기 때문이었다.
난독증을 야기하는 원인은 불균형한 두뇌의 발달이다. 언어를 담당하는 좌뇌 기능이 취약하면 그 보상을 위해 운동이나 예술, 창의적인 사고를 담당하는 우뇌가 더 발달한다고 한다. 난독증을 가진 이들 중에 운동선수나 천재, 예술가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다. 이 아이 또한 조그만 체구에도 발이 얼마나 재빠른지 공을 찰 때만큼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눈에 받았다. 대안학교엔 공부나 책읽기 말고도 그 아이가 끼를 펼치고 인정받을 수 있는 통로가 많았다. 그렇게 우리의 아니, 나의 비장한 ‘읽(히)기 프로젝트’는 일주일 만에 막을 내렸다(다행히도 그 노력들은 훗날 난독증을 가진 다른 아이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십대가 된 그 아이는 지금도 여전히 글을 읽지 못하지만 학교에 다니고 연애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하며 보통의 이십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 글을 읽지 못하는데 어디서 어떻게 정보를 받아들이며 살아가나, 그런 그 아이를 신기하게 여기는 것 자체가 이미 내가 글의 층위에 갇힌 사람이라는 반증 아닐까 싶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난독증이 아닌 사람들도 일 년 동안 책 한 권 읽지 않아도 다들 잘 살아간다. 그렇다고 그들이 생각 없이 그냥 사는 것도 아니다. 드라마든 영화든 뉴스든 다들 나름의 정보로 세상을 읽어가면서, 자기 인생에 대해 고민하면서 나름의 삶을 꾸려간다. 평생 이름 석 자 쓰지 못한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정직하게 소박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함께 살아오지 않았던가. 세상이 복잡해지고 알아야 할 것이 많아졌다지만 세상을 망치는 건 다 배운 놈들이라는 말도 틀리진 않으니, 지식과 지혜는 별개의 문제인 것도 같다.
글은 오랫동안 소수의 집권자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수단으로 쓰여왔다. 문해능력이 보편화된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글은 권력을 만들어내고 계층을 형성한다. 지식인들이 사회의 주요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독서가 개인과 국가의 경쟁력”이라며 정부가 국민들의 독서량을 조사해 발표하는 것도 그렇다. 시민들의 독서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취지라지만, 그 통계는 읽지 않는 행위에 대한 위기감과 열등감을 조장한다. 책을 읽는 것이 국민의 수준이고 시민의 품격인 것처럼 설정하는 것 자체에 이미 글의 권력화가 작동하고 있다.
게다가 국민들의 연간 독서량 조사는 통계의 왜곡을 안고 있다. 국민들의 연간 독서량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종이책 기준이다. 지하철에서 길거리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게임만 하는 게 아니라 책도 읽고, 뉴스도 보고, 강의도 듣는다. 종이책을 읽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여러 매체로 각종 정보를 받아들이는 측면에서의 읽기, 지식의 습득은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독서의 중요성과 유용함에 관한 이야기야 새삼 짚어볼 필요도 없지만, 그렇게 습득한 지식과 정보가 사람들의 삶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독서량과 시민의식은 비례할까.
무엇을 읽어왔는지가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다
흔히 독서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무엇을 읽어왔는지가 그 사람이다”라는 마틴 발저의 격언이 인용되지만, 그렇다고 무엇을 ‘읽어’왔는지가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세상을 받아들이고 배워가는 방법에 꼭 읽기만 있는 건 아니다. 누구는 보면서, 누구는 들으면서, 누구는 몸으로 직접 해보면서 사람을 사귀고 삶을 배워간다.
글을 읽지 못하던 그 아이는 운동신경 말고도 탁월한 점이 있었는데, 그건 공감능력이었다. 누가 힘들어하는 걸 보면 그냥 넘어가질 못했다. 도덕적 판단에 의한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움직이는 느낌이랄까. 소아정신과 의사 서천석에 따르면 공감능력은 대부분 타고나는 것이라 한다. 이성 이전의 본능과 감정의 영역이어서 후천적으 로 습득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이들이 오히려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데 유리한 것은,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공감에 필요한 에너지를 인지적 활동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질척거리지 않고 깔끔한 것, 쿨한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요즘 사회의 정서에서는 더욱 그렇다. 인지능력으로 성공한 사람이 많은 사회, 지금 우리의 불행은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를 위해 이것저것 공부하러 다니던 그때, 내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은 ‘이대로는 안 된다’였다. ‘글을 읽을 줄 알아야 살아가지 않겠는가.’ 그 생각에는 ‘읽지 않는 삶’의 가능성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읽음으로써 더 좋아지는 삶’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었고, 읽지 않는 삶을 상상해본 적 없는 내 한계였다. 왜 읽어야 하는지, 인간에게 읽기란 무엇인지, 안 읽고도 살아가는 삶은 어떤지, 그런 질문은 던져 보지도 않은 채 당위에만 갇힌 선생의 서툰 의욕이 아이의 인생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 그리스인 조르바는 말한다.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랴.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과연 읽어야 사람다워지는가. 사람답다는 건 무엇이고, 사람다워지는 길은 무엇인가. 그때 했어야 할 고민들을 책을 만들고 글을 만지는 사람이 된 지금에야 시작한다. 읽는 삶만큼이나 충만할 수도 있는, 읽지 않는 삶의 가능성 또한 곁에 나란히 견주어두고서.
장희숙·편집장 mindle1603@gmail.com
ⓒ David Flaherty
읽지 못하는 아이
교사 시절, 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독서 수업을 하는데, 아무리 쉽고 얇은 책을 정해주어도 도무지 읽어오지 않는 그의 태도를 나는 ‘불성실함’으로만 여겼다. ‘고얀 놈!’ 싶어서 붙잡고 늘어지자 아이는 난독증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정확히는 “글이라고 생긴 건 한 줄도 못 읽어요”라고 했다. 한글을 모르는 건 아닌데 글자들이 붙어 있으면 이상하게 제멋대로 흩어져 의미 파악이 안 된다는 것이다. 태어나서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니. 내색은 안 했지만 약간 충격을 받은 내게 아이는, 친구들도 모르고 심지어 엄마 아빠도 모르는 사실이니 비밀로 해달라고 거듭 당부를 했다. 읽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살면서 무언가 읽을 일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읽을 수 없는 것들을 읽는 척하며 살아온 아이의 인생에 짠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 마음 저 깊은 곳에선 ‘내 반드시 너를 읽게 하리라!’ 하는 교육적 사명감이 불끈 솟아올랐다. ‘읽혀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동분서주했다. 방학 동안 난독증에 관한 책을 읽고, 독서치료 연수와 그림책 수업을 찾아다니고, 뇌과학 강의도 들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메모를 하며 난독증 탈출을 위한 특급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글을 읽지 못하면 지적 소양이 결핍될 것도 걱정이었지만, 그 아이가 영영 ‘읽는 기쁨’을 모르고 살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다.
어린 시절, 일찌감치 혼자 글을 터득한 나는 글자만 보면 달려들어 읽어댔다. 어쩔 수 없이 엄마는 빠듯한 형편에도 각종 전집과 백과사전을 한쪽 벽에 빽빽히 꽂힐 만큼 사주셨다. 그래도 늘 읽을 것이 귀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읽고 또 읽다 싫증이 나면 정육점에서 돼지고기를 살 때 둘둘 말아준 신문지를 손바닥으로 펴가며 읽었다. 나중엔 아버지가 정기 구독하던 <월간 새농민>까지 독파했다. ‘파종’이나 ‘제초’ 같은 어려운 단어가 나오면 국어사전과 백과사전을 뒤져보면서 탐험하듯 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해가 저문 줄도 모르고 컴컴해진 방 안에서 손가락으로 밑줄을 짚어가며 책을 읽던 기억이 생생하다. 스토리에 몰입해 때때로 차오르던 감동의 순간,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쁨! 그 빛나는 시간들이 이 아이의 인생에는 없다니, 너무 안타까웠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사회적 학습 능력’의 핵심인 ‘독서’를 하지 못하고 캄캄하게 살아갈 아이의 인생이 실로 걱정되었다.
그 안에 담긴 내용뿐 아니라 책이라는 물성이 주는 정서적 안도감, 한 손에 그러쥐었을 때의 그 단단한 만족감이나 바스락거리며 책장이 넘어갈 때의 설렘은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었다. 그걸 모르고 살아가는 건 불행한 삶이라고까지 생각하던 그 시절의 나는, 아이를 반드시 읽도록 만들겠노라 여러 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독서량과 시민의식은 비례할까
방학 동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새 학기가 시작되자 아이와 나는 다른 사람들 모르게 ‘읽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뇌도 근육처럼 지속적으로 쓰는 곳이 단련된다는 뇌 가소성에 따라, 일주일에 세 번 만나 읽기 연습을 하기로 했다. 책은 보기만 해도 울렁증이 생긴다기에, 대신 읽고 싶은 것을 골라 오라 했다. 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록 밴드에 관한 기사 몇 장을 내가 알려준 대로 자간을 넓게 조정해서 출력해왔다. 다행히 아이는 문자를 해석하면서 동시에 그 뜻을 파악하는 것만 어려워했지, 비슷한 단어를 듣고도 구분하지 못하는 청각적 난독증이나 글씨를 쓰는 데 어려움이 있는 운동 난독증은 없었다.
그런데 딱 일주일 후, 아이가 풀 죽은 표정으로 그만하면 안 되냐고 물었다. 올 것이 왔구나, 이렇게 쉽게 포기할 거냐고 으름장을 놓으려 던 나는 “차라리 온종일 밭에서 김을 매는 게 낫겠어요”라는 말에 멈칫했다. 제 나름으로는 다른 아이들이 가장 힘들어하고 싫어하는 ‘밭 에서 종일 김 매는 일’에 견주며 자신에게 읽는 행위가 얼마나 힘든지를 호소한 것이다. 조금만 더 참고 해보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꿀꺽 삼켰다. 아이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너를 위해 황금 같은 여름방학을 바쳤건만’ 하는 서운한 마음이 올라왔지만 생각해보면 그 또한 결국 내가 좋아서 혼자 분주했던 날들이었다.
곰곰이 상황을 돌이켜보니 “읽을 수 있으면 좋죠” 정도였던 아이의 반응이, 의욕이 앞선 내겐 “저 너무나 읽고 싶어요”로 들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이는 읽지 못하는 삶이 부끄럽긴 했으나, 읽지 않아도 살아갈 만했던 것이다. 글을 읽느니 차라리 밭일을 하겠다고 한 건 읽기에 대한 절박함도 없었거니와,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몸으로 하는 일에 자신 있기 때문이었다.
난독증을 야기하는 원인은 불균형한 두뇌의 발달이다. 언어를 담당하는 좌뇌 기능이 취약하면 그 보상을 위해 운동이나 예술, 창의적인 사고를 담당하는 우뇌가 더 발달한다고 한다. 난독증을 가진 이들 중에 운동선수나 천재, 예술가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다. 이 아이 또한 조그만 체구에도 발이 얼마나 재빠른지 공을 찰 때만큼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눈에 받았다. 대안학교엔 공부나 책읽기 말고도 그 아이가 끼를 펼치고 인정받을 수 있는 통로가 많았다. 그렇게 우리의 아니, 나의 비장한 ‘읽(히)기 프로젝트’는 일주일 만에 막을 내렸다(다행히도 그 노력들은 훗날 난독증을 가진 다른 아이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십대가 된 그 아이는 지금도 여전히 글을 읽지 못하지만 학교에 다니고 연애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하며 보통의 이십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 글을 읽지 못하는데 어디서 어떻게 정보를 받아들이며 살아가나, 그런 그 아이를 신기하게 여기는 것 자체가 이미 내가 글의 층위에 갇힌 사람이라는 반증 아닐까 싶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난독증이 아닌 사람들도 일 년 동안 책 한 권 읽지 않아도 다들 잘 살아간다. 그렇다고 그들이 생각 없이 그냥 사는 것도 아니다. 드라마든 영화든 뉴스든 다들 나름의 정보로 세상을 읽어가면서, 자기 인생에 대해 고민하면서 나름의 삶을 꾸려간다. 평생 이름 석 자 쓰지 못한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정직하게 소박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함께 살아오지 않았던가. 세상이 복잡해지고 알아야 할 것이 많아졌다지만 세상을 망치는 건 다 배운 놈들이라는 말도 틀리진 않으니, 지식과 지혜는 별개의 문제인 것도 같다.
글은 오랫동안 소수의 집권자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수단으로 쓰여왔다. 문해능력이 보편화된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글은 권력을 만들어내고 계층을 형성한다. 지식인들이 사회의 주요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독서가 개인과 국가의 경쟁력”이라며 정부가 국민들의 독서량을 조사해 발표하는 것도 그렇다. 시민들의 독서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취지라지만, 그 통계는 읽지 않는 행위에 대한 위기감과 열등감을 조장한다. 책을 읽는 것이 국민의 수준이고 시민의 품격인 것처럼 설정하는 것 자체에 이미 글의 권력화가 작동하고 있다.
게다가 국민들의 연간 독서량 조사는 통계의 왜곡을 안고 있다. 국민들의 연간 독서량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종이책 기준이다. 지하철에서 길거리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게임만 하는 게 아니라 책도 읽고, 뉴스도 보고, 강의도 듣는다. 종이책을 읽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여러 매체로 각종 정보를 받아들이는 측면에서의 읽기, 지식의 습득은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독서의 중요성과 유용함에 관한 이야기야 새삼 짚어볼 필요도 없지만, 그렇게 습득한 지식과 정보가 사람들의 삶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독서량과 시민의식은 비례할까.
무엇을 읽어왔는지가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다
흔히 독서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무엇을 읽어왔는지가 그 사람이다”라는 마틴 발저의 격언이 인용되지만, 그렇다고 무엇을 ‘읽어’왔는지가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세상을 받아들이고 배워가는 방법에 꼭 읽기만 있는 건 아니다. 누구는 보면서, 누구는 들으면서, 누구는 몸으로 직접 해보면서 사람을 사귀고 삶을 배워간다.
글을 읽지 못하던 그 아이는 운동신경 말고도 탁월한 점이 있었는데, 그건 공감능력이었다. 누가 힘들어하는 걸 보면 그냥 넘어가질 못했다. 도덕적 판단에 의한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움직이는 느낌이랄까. 소아정신과 의사 서천석에 따르면 공감능력은 대부분 타고나는 것이라 한다. 이성 이전의 본능과 감정의 영역이어서 후천적으 로 습득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이들이 오히려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데 유리한 것은,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공감에 필요한 에너지를 인지적 활동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질척거리지 않고 깔끔한 것, 쿨한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요즘 사회의 정서에서는 더욱 그렇다. 인지능력으로 성공한 사람이 많은 사회, 지금 우리의 불행은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를 위해 이것저것 공부하러 다니던 그때, 내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은 ‘이대로는 안 된다’였다. ‘글을 읽을 줄 알아야 살아가지 않겠는가.’ 그 생각에는 ‘읽지 않는 삶’의 가능성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읽음으로써 더 좋아지는 삶’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었고, 읽지 않는 삶을 상상해본 적 없는 내 한계였다. 왜 읽어야 하는지, 인간에게 읽기란 무엇인지, 안 읽고도 살아가는 삶은 어떤지, 그런 질문은 던져 보지도 않은 채 당위에만 갇힌 선생의 서툰 의욕이 아이의 인생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 그리스인 조르바는 말한다.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랴.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과연 읽어야 사람다워지는가. 사람답다는 건 무엇이고, 사람다워지는 길은 무엇인가. 그때 했어야 할 고민들을 책을 만들고 글을 만지는 사람이 된 지금에야 시작한다. 읽는 삶만큼이나 충만할 수도 있는, 읽지 않는 삶의 가능성 또한 곁에 나란히 견주어두고서.
장희숙·편집장 mindle160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