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을 걷 는 다 는 것
길은 훌륭한 배움터일 수 있다. 도시화가 진행되기 전에는 아이들이 학교
를 오가는 길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친구와 장난도 치고 다
투기도 하면서 꽤 먼 길을 날마다 걸어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에게 어쩌면
길이 더 훌륭한 학교가 아니었을까. 학교를 오가는 길만 그랬던 것이 아니
다. 골목길도 아이들에게는 사실상 교실보다 더 훌륭한 배움터였다. 온 동
네 아이들이 모여서 노는 골목에서 아이들은 우정을 쌓고, 어울려 노는 법
과 힘의 역학을 익혔다.
많은 아이들은 길거리에 나붙은 간판들을 보면서 한글을 익히기도 한다.
한글의 법칙을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길가에는 언제나
신기한 것들로 가득하고, 길은 세상으로 이어지는 문이다. 어린 시절 처음으
로 읍내에 나간 날을 잊지 못한다. 신작로를 따라 읍내를 걸어 다니면서 얼
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십여 년 뒤 중학교 시절 오전 시간에 일찍 학교를
조퇴하고 홀로 읍내를 나갔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휴일이 아닌 평일
낮에 본 길거리는 매우 낯설었다. 편평한 칠판만 쳐다보다 바깥세상으로 나
오니 마치 2차원 세계에서 3차원 세계로 이동한 것처럼 낯선 세상 속에 들
어선 느낌, 동시에 뭔가에 속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삶에서 분리된 학교
공간이 제대로 된 배움터일 수가 없음을 명확히 깨닫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지만, 느낌은 그때 싹텄다.
길을 학교 삼아 배우는 여행학교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해외여행이 자
유로워지면서부터 비행기를 타고 멀리 해외로 나가는 경우도 많은데, 원래
여행은 길과 함께하는 것이다. 하늘을 날아가는 것은 이동이지 여행이 아니
다. 물론 육로가 막힌 나라이니 바다 건너 가기 위해서는 뱃길이나 하늘길
을 이용할 수밖에 없지만, 해외에 가서도 차를 타고 이동하기보다 되도록
걸어서 다니는 것이 여행 본래의 의미를 살리는 길이다. 더 많은 곳을 보고
오겠다는 욕심으로 바퀴와 날개의 힘을 빌어 바삐 돌아다니기보다 자신의
두 다리가 이끄는 대로 세상 속을 천천히 걸어서 다니는 걷기여행이야말로
여행의 진수가 아닐까.
걷기여행은 커리큘럼이 될 수 없다. 커리큘럼이란 경주마가 달리는 코스
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비롯된 말이다.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주도면밀하
게 기획된 과정을 뜻한다. 걷기여행은 여기에서 저기까지의 이동이 아니라 ‘
지금 여기’에 오롯이 존재하는 것이다. 어딘가로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저 걷기 위해 걷는 것이다. 여행하는 동안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한 걸음
한 걸음 속에 시간은 녹아 사라진다. 다른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 그것이 걷기여행의 본질이다.
걷 기 의 연 금 술
벨기에의 ‘오이코텐(Okoten)’이란 민간단체는 교도소에 수감될 비행 청소
년들을 위한 걷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걸로 유명하다. 청소년 두 명이 어
른 한 사람과 함께 2천~2천5백km를 3개월 동안 걷고 나면 사면되어 사회
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다. 걷는 동안 라디오나 MP3 플
레이어 같은 기기를 휴대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하며, 스스로 숙식을 해결
하고, 갈 길을 선택해야 한다. 선택에 따른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도 그들
몫이다. 그 과정에서 함께 걷는 이들에게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훈련도 자
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청소년 중 60퍼센트 이상이
사회 복귀에 성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걷는 행위가 신체와
정신에 미치는 영향에 더해 자연과의 깊은 만남, 동행하는 이들과의 만남,
길 위에서의 우연한 만남 등이 알게 모르게 연금술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리라.
전직 기자인 프랑스인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터키 이
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1만2천km에 이르는 실크로드를 걷기 시작했
다. 한 해 3천km씩 네 해에 걸쳐 걸은 뒤 그 기록을 『나는 걷는다』라는 책
으로 펴냈다. 비단길을 걷기 전에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2
천3백km에 이르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오이코텐 이야기를 듣고
영감을 받아 2000년에 비행 청소년들을 돕는 ‘쇠이유(Seuil 출발, 문턱을 뜻
하는 프랑스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올리비에가 비단길을 걸을 무렵 쇠이
유를 통해 청소년 네 명이 이탈리아를 거쳐 발트해와 아드리아해에 이르는
2천5백km를 걷고서 주변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새 출발을 했다. 쇠이유의
걷기 과정을 마친 청소년들의 재범률은 15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한다. 프랑
스의 일반적인 청소년 재범률이 85퍼센트에 이르는 것에 비하면 놀라운 결
과다.**
올리비에가 걷기 시작했을 때 그의 인생은 막다른 길에 닿아 있었다고 한
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일터에서도 물러나면서 자신이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며 우울증에 빠져들던 그를 구원한 것이
바로 걷기였다. 홀로 실크로드를 걸으며 숱한 위험을 겪었다. 내전 중이던
터키를 통과할 때는 정부군과 혁명군 양쪽에 끌려 다녔고, 말이 통하지 않
는 낯선 땅에서는 수도 없이 길을 잃었다고 한다. 도둑과 짐승의 위험에 맞
섰고, 이질에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고마운 사람이 훨씬 더 많았
다”고 말한다. 실크로드에서 사귄 사람들만도 1만5천여 명에 이를 거라고
한다.
여행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를 더 큰 배움으로 인도하는
축복일 수도 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이들이 오가면서 순례길이 웬만큼 알
려져 오늘날에는 길을 헤맬 염려가 별로 없겠지만, 옛날에는 인적 드문 곳
에서 길을 잃으면 며칠, 몇 달을 헤매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길을 잃음으
로써 어쩌면 순례의 본래 목적에 더 가닿았을 수도 있다. 길을 잃는 것이 자
기 발견의 길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
나의 사건이다. 알고 있던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자기가 서 있는 자
리를 점검하고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음을 말해주는 사건
이다. 순례자는 어쩌면 길을 잃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우리말로 ‘산티아고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스페인 북부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순례길이다.
콤포스텔라는 예수의 제자인 야곱(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파리, 마드리드 등 유럽 곳곳에서 출발해
산티아고로 향하는 모든 길이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프랑스 국경지대인
생장 피에드 포르(Saint-Jena-Pied-Port)에서 시작해 콤포스텔라까지 약 8백㎞에 이르는 길을
산티아고 순례길이라 일컫는다.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이 길을 걷고 난 뒤 자신의 삶이
바뀌었다고 말해 더욱 알려지기도 했다.
** 우리나라에서도 오이코텐과 비슷한 청소년 프로그램이 시도된 적이 있다. 제주보호관찰소가
오이코텐을 벤치마킹하여 2009년 보호관찰 대상 청소년들이 제주 올레길을 걷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지속되지는 못했다. 자기 한계에 직면하는 경험을 하기에 2백km 남짓한 제주 올레길은 사실상 너무 짧다.
통일이 되면 연해주나 중국, 동남아, 유럽까지도 걸어서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혜초가 걸었던 실크로드를
우리 아이들이 밟을 수 있게 될 날이 언제 올까.
치 유 와 성 숙 을 돕 는 걷 기 여 행
2012년 ‘월드 트레일 콘퍼런스’에 강연자로 초청되어 제주를 방문한 올리
비에는, 한국에 불기 시작한 걷기 열풍은 한국 사회가 성찰의 시기로 접어
들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들이 천천히 걸으
면서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시작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산티아
고 순례길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자주 마주치는 이들이 바로 한국인들이라
고 한다.
걷기만큼 우리를 성찰의 길로 인도하는 행위도 드물 것이다. 걷기여행은
젊은이에게든 늙은이에게든 놀라운 치유의 과정이 될 수 있다. 같은 길을
걸어도 저마다 다른 치유의 과정이 일어날 것이다.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길은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존재
들이 스승이 되어 뜻밖의 가르침을 줄 것이다. 길이 곧 스승이다. 길 없는
길을 걸어 자신에게로 이르는 것이 인간 삶의 본질인지 모른다.
꼭 비행 청소년들이 아니어도 걷기여행은 성장기의 청소년들에게 자기를
발견하고 세상을 발견하게 돕는 훌륭한 안내자가 되어준다. 오랜 역사를 자
랑하는 프랑스의 도제제도에는 도제들이 전국을 돌면서 곳곳에 있는 장인
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돌아와 스승에게 실력을 증명하는 관습이 있었다.
도제들이 반드시 거치게끔 되어 있는 이 도보순례는 그 자체로 훌륭한 교
육과정이었던 셈이다. 14세기에 시작된 이 전통은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졌
는데, 오늘날에도 그 맥이 살아 있다고 한다. 의무가 아닌 선택 과정이 되
고, 비록 대부분 기차나 자동차로 여행을 하지만 전통을 존중하는 일부 도
제는 여전히 걸어서 순례를 한다고 한다.
“길 위에서 배우고 놀고 연대하는 학교”를 지향하는 대안학교 ‘로드스콜
라’도 걷기여행을 중요한 교육과정으로 삼는다. 마리학교에서 청소년, 청년
들과 함께 진행한 백일학교도 백일 동안 전국의 장인들을 찾아다니면서 한
수 배우는 것을 주요 교육과정으로 삼았다. 차편과 도보여행을 병행했는데,
도보순례를 원칙으로 했더라면 더 좋았을 듯하다. 부산의 우다다학교에서
진행하는 무전여행도 주목할 만한 교육과정이다. 경남 양산의 창조학교도
여행을 주요 교육과정으로 삼는다. 길이 어떤 학교보다 훌륭한 배움터일 수
있음을 증거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위탁형 학교처럼 ‘학교에 질린’ 아이
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일수록 이런 상상력이 필요할 것이다. 쇠이유나 오
이코텐의 걷기여행은 말하자면 유럽식 백일학교라고 할 수 있다. 백일 동안
2천km를 걷는 것이 주요 교육과정인 셈이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아 2천km씩 걷기는 힘들지만, 전국을 돌면서 아이들
이 한 번쯤 만나보면 좋을 분들을 만나면서 걷는다면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도 있다. 꼭 알려진 스승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에게 스승이 되어줄 수 있는
지혜롭고 자비로운 이들이 곳곳에 있다. 농사를 짓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가 어쩌면 누구보다 훌륭한 스승이 되어주실 수도 있다. 이야기를 나누고
일을 거들기도 하면서 걷다보면 아마 백일 동안 걷는 거리는 1천km 남짓
되겠지만 아이들의 변화는 더 클지도 모른다. 공동체 운동을 하는 분들 중
에도 부탁을 하면 기꺼이 선생 역할을 맡아줄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지
리적 여건은 좋지 않더라도 우리의 장점을 살려볼 일이다.
학 교 화 된 걷 기 , 국 토 순 례
어떤 목표를 정하고 걸으면 걷기를 제대로 즐기기가 어렵다. 마음 상태가
목표지향적으로 되어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기가 힘들어진다. 더욱이
국토순례 같이 무리지어 걸으면 앞사람을 좇아서 습관적으로 발걸음을 옮
기게 된다. 수십 수백 명이 줄지어 어디서 어디까지 걷는 행위는 교실이나
강당에 모여 앉아 강의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 자기 리듬대로 학습하지 못
하고 진도를 따라가듯이 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국토순례가 학교 교육과정
으로 편입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그 걷기 행위가 학교화되어 있음을 반증
한다. 주어진 교육과정이 있고, 진도도 정해져 있고, 집단적으로 따라야 하
는 것은 학교나 군대가 선호하는 방식이다.
국토순례는 사실상 군인들의 행군과 유사하다. 무리지어 하루에 수십 킬
로미터를 걸어서 이동하는 행군은 신체 단련과 정신력 강화에는 도움이 되
겠지만 걷는 행위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다양한 선물은 놓치기 십상이다.
국토순례라는 커리큘럼의 일반적인 교육목표를 들자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성취감을 맛보게 하는 것이 주요 목표일 것이다. 이른바 극기훈련인 셈이다.
성취감과 함께 고난이 끝난 뒤의 평화로움을 맛볼 수 있는 장점은 있겠지
만, 아이들의 성장을 위한 교육과정으로서는 아쉬운 점이 많다.
오이코텐에서 하는 걷기여행이나 우다다학교에서 시도한 무전여행은 여
행 코스를 청소년들이 스스로 선택하게 하고, 거기에 따르는 책임도 스스
로 지게 한다는 점에서 학교식 국토순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집단적인
교육과정이 아니라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맞는 개별화된 교육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국토순례처럼 앞사람 뒤꼭지만 바라보며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
려 애쓰면서 걷다 보면 눈길을 끄는 풍경이나 나무가 있어도 멈춰 서서 물끄
러미 바라볼 수 없다. 걷기여행의 진미는 길에서 처음 만나는 벌레나 새에
눈길을 뺏기기도 하고,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과 서로 도움을 주
고받기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 데 있다.
둘 또는 서너 명이 먼 길을 함께 걷더라도 저마다 홀로 걷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홀로 걷는 길이야말로 자기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야기를 나누면서 걷기, 말없이 함께 걷기, 홀로 사색에 잠겨 걷기, 아무런
생각 없이 순간순간 자신의 발걸음을 자각하며 걷기, 풍경을 감상하며 걷
기, 풍경 속으로 스며들며 걷기…. 이 모든 걷기는 상당히 다른 경험으로 우
리에게 다가온다.
해병대 캠프처럼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이른바 극기훈련들은 자기
를 강화하는 훈련이지 넘어서는 훈련이 아니다.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의
미에서 극기와는 정반대 방향인 셈이다. 극기훈련 식으로 걷게 하는 것은
걷기의 즐거움을 앗아갈 뿐만 아니라 걷기에 대한 나쁜 추억을 갖게 만들
기 쉽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식의 자신감은 며칠만 지나면 흔적 없이 사라
지지만 이런 기억은 몸에 각인된다. 몸이 걷기를 즐거운 경험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린 시절 그 한 가지만 몸이 제대로 기억해도 아이의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을 배운 것이다.
아 이 들 을 걷 게 하 자
걷는 것만으로도 많은 문제가 풀린다. 두 발로 걷는 행위는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든 가장 원초적인 몸놀림이다. 많이 걸으면 저절로 인간다워진다.
인성교육이니 상담이니, 복잡한 기술을 고민할 필요도 없다. 중화고등학교
방승호 교장이 문제를 안고 있는 학생들에게 산책을 자주 권하는 것은 매
우 훌륭한 교육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 스스로 문제의 본질을 볼 수 있
게 돕는 것이다. 당신 스스로도 고민거리가 있으면 늘 산책을 한다고 한다.
걷다 보면 해결책이 떠오른다. 걷기는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우면서 놀라운 해법이다. 제대로 걸으면 웬만한 병도 다
낫는다. 굳이 걷기여행을 하지 않더라도 일상 속에서 즐겨 걷는 것이야말로
잘 사는 지름길일지 모른다. 아무쪼록 길과 친해질 일이다.
길 을 걷 는 다 는 것
길은 훌륭한 배움터일 수 있다. 도시화가 진행되기 전에는 아이들이 학교
를 오가는 길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친구와 장난도 치고 다
투기도 하면서 꽤 먼 길을 날마다 걸어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에게 어쩌면
길이 더 훌륭한 학교가 아니었을까. 학교를 오가는 길만 그랬던 것이 아니
다. 골목길도 아이들에게는 사실상 교실보다 더 훌륭한 배움터였다. 온 동
네 아이들이 모여서 노는 골목에서 아이들은 우정을 쌓고, 어울려 노는 법
과 힘의 역학을 익혔다.
많은 아이들은 길거리에 나붙은 간판들을 보면서 한글을 익히기도 한다.
한글의 법칙을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길가에는 언제나
신기한 것들로 가득하고, 길은 세상으로 이어지는 문이다. 어린 시절 처음으
로 읍내에 나간 날을 잊지 못한다. 신작로를 따라 읍내를 걸어 다니면서 얼
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십여 년 뒤 중학교 시절 오전 시간에 일찍 학교를
조퇴하고 홀로 읍내를 나갔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휴일이 아닌 평일
낮에 본 길거리는 매우 낯설었다. 편평한 칠판만 쳐다보다 바깥세상으로 나
오니 마치 2차원 세계에서 3차원 세계로 이동한 것처럼 낯선 세상 속에 들
어선 느낌, 동시에 뭔가에 속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삶에서 분리된 학교
공간이 제대로 된 배움터일 수가 없음을 명확히 깨닫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지만, 느낌은 그때 싹텄다.
길을 학교 삼아 배우는 여행학교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해외여행이 자
유로워지면서부터 비행기를 타고 멀리 해외로 나가는 경우도 많은데, 원래
여행은 길과 함께하는 것이다. 하늘을 날아가는 것은 이동이지 여행이 아니
다. 물론 육로가 막힌 나라이니 바다 건너 가기 위해서는 뱃길이나 하늘길
을 이용할 수밖에 없지만, 해외에 가서도 차를 타고 이동하기보다 되도록
걸어서 다니는 것이 여행 본래의 의미를 살리는 길이다. 더 많은 곳을 보고
오겠다는 욕심으로 바퀴와 날개의 힘을 빌어 바삐 돌아다니기보다 자신의
두 다리가 이끄는 대로 세상 속을 천천히 걸어서 다니는 걷기여행이야말로
여행의 진수가 아닐까.
걷기여행은 커리큘럼이 될 수 없다. 커리큘럼이란 경주마가 달리는 코스
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비롯된 말이다.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주도면밀하
게 기획된 과정을 뜻한다. 걷기여행은 여기에서 저기까지의 이동이 아니라 ‘
지금 여기’에 오롯이 존재하는 것이다. 어딘가로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저 걷기 위해 걷는 것이다. 여행하는 동안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한 걸음
한 걸음 속에 시간은 녹아 사라진다. 다른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 그것이 걷기여행의 본질이다.
걷 기 의 연 금 술
벨기에의 ‘오이코텐(Okoten)’이란 민간단체는 교도소에 수감될 비행 청소
년들을 위한 걷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걸로 유명하다. 청소년 두 명이 어
른 한 사람과 함께 2천~2천5백km를 3개월 동안 걷고 나면 사면되어 사회
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다. 걷는 동안 라디오나 MP3 플
레이어 같은 기기를 휴대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하며, 스스로 숙식을 해결
하고, 갈 길을 선택해야 한다. 선택에 따른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도 그들
몫이다. 그 과정에서 함께 걷는 이들에게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훈련도 자
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청소년 중 60퍼센트 이상이
사회 복귀에 성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걷는 행위가 신체와
정신에 미치는 영향에 더해 자연과의 깊은 만남, 동행하는 이들과의 만남,
길 위에서의 우연한 만남 등이 알게 모르게 연금술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리라.
전직 기자인 프랑스인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터키 이
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1만2천km에 이르는 실크로드를 걷기 시작했
다. 한 해 3천km씩 네 해에 걸쳐 걸은 뒤 그 기록을 『나는 걷는다』라는 책
으로 펴냈다. 비단길을 걷기 전에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2
천3백km에 이르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오이코텐 이야기를 듣고
영감을 받아 2000년에 비행 청소년들을 돕는 ‘쇠이유(Seuil 출발, 문턱을 뜻
하는 프랑스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올리비에가 비단길을 걸을 무렵 쇠이
유를 통해 청소년 네 명이 이탈리아를 거쳐 발트해와 아드리아해에 이르는
2천5백km를 걷고서 주변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새 출발을 했다. 쇠이유의
걷기 과정을 마친 청소년들의 재범률은 15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한다. 프랑
스의 일반적인 청소년 재범률이 85퍼센트에 이르는 것에 비하면 놀라운 결
과다.**
올리비에가 걷기 시작했을 때 그의 인생은 막다른 길에 닿아 있었다고 한
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일터에서도 물러나면서 자신이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며 우울증에 빠져들던 그를 구원한 것이
바로 걷기였다. 홀로 실크로드를 걸으며 숱한 위험을 겪었다. 내전 중이던
터키를 통과할 때는 정부군과 혁명군 양쪽에 끌려 다녔고, 말이 통하지 않
는 낯선 땅에서는 수도 없이 길을 잃었다고 한다. 도둑과 짐승의 위험에 맞
섰고, 이질에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고마운 사람이 훨씬 더 많았
다”고 말한다. 실크로드에서 사귄 사람들만도 1만5천여 명에 이를 거라고
한다.
여행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를 더 큰 배움으로 인도하는
축복일 수도 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이들이 오가면서 순례길이 웬만큼 알
려져 오늘날에는 길을 헤맬 염려가 별로 없겠지만, 옛날에는 인적 드문 곳
에서 길을 잃으면 며칠, 몇 달을 헤매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길을 잃음으
로써 어쩌면 순례의 본래 목적에 더 가닿았을 수도 있다. 길을 잃는 것이 자
기 발견의 길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
나의 사건이다. 알고 있던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자기가 서 있는 자
리를 점검하고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음을 말해주는 사건
이다. 순례자는 어쩌면 길을 잃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우리말로 ‘산티아고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스페인 북부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순례길이다.
콤포스텔라는 예수의 제자인 야곱(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파리, 마드리드 등 유럽 곳곳에서 출발해
산티아고로 향하는 모든 길이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프랑스 국경지대인
생장 피에드 포르(Saint-Jena-Pied-Port)에서 시작해 콤포스텔라까지 약 8백㎞에 이르는 길을
산티아고 순례길이라 일컫는다.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이 길을 걷고 난 뒤 자신의 삶이
바뀌었다고 말해 더욱 알려지기도 했다.
** 우리나라에서도 오이코텐과 비슷한 청소년 프로그램이 시도된 적이 있다. 제주보호관찰소가
오이코텐을 벤치마킹하여 2009년 보호관찰 대상 청소년들이 제주 올레길을 걷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지속되지는 못했다. 자기 한계에 직면하는 경험을 하기에 2백km 남짓한 제주 올레길은 사실상 너무 짧다.
통일이 되면 연해주나 중국, 동남아, 유럽까지도 걸어서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혜초가 걸었던 실크로드를
우리 아이들이 밟을 수 있게 될 날이 언제 올까.
치 유 와 성 숙 을 돕 는 걷 기 여 행
2012년 ‘월드 트레일 콘퍼런스’에 강연자로 초청되어 제주를 방문한 올리
비에는, 한국에 불기 시작한 걷기 열풍은 한국 사회가 성찰의 시기로 접어
들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들이 천천히 걸으
면서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시작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산티아
고 순례길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자주 마주치는 이들이 바로 한국인들이라
고 한다.
걷기만큼 우리를 성찰의 길로 인도하는 행위도 드물 것이다. 걷기여행은
젊은이에게든 늙은이에게든 놀라운 치유의 과정이 될 수 있다. 같은 길을
걸어도 저마다 다른 치유의 과정이 일어날 것이다.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길은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존재
들이 스승이 되어 뜻밖의 가르침을 줄 것이다. 길이 곧 스승이다. 길 없는
길을 걸어 자신에게로 이르는 것이 인간 삶의 본질인지 모른다.
꼭 비행 청소년들이 아니어도 걷기여행은 성장기의 청소년들에게 자기를
발견하고 세상을 발견하게 돕는 훌륭한 안내자가 되어준다. 오랜 역사를 자
랑하는 프랑스의 도제제도에는 도제들이 전국을 돌면서 곳곳에 있는 장인
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돌아와 스승에게 실력을 증명하는 관습이 있었다.
도제들이 반드시 거치게끔 되어 있는 이 도보순례는 그 자체로 훌륭한 교
육과정이었던 셈이다. 14세기에 시작된 이 전통은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졌
는데, 오늘날에도 그 맥이 살아 있다고 한다. 의무가 아닌 선택 과정이 되
고, 비록 대부분 기차나 자동차로 여행을 하지만 전통을 존중하는 일부 도
제는 여전히 걸어서 순례를 한다고 한다.
“길 위에서 배우고 놀고 연대하는 학교”를 지향하는 대안학교 ‘로드스콜
라’도 걷기여행을 중요한 교육과정으로 삼는다. 마리학교에서 청소년, 청년
들과 함께 진행한 백일학교도 백일 동안 전국의 장인들을 찾아다니면서 한
수 배우는 것을 주요 교육과정으로 삼았다. 차편과 도보여행을 병행했는데,
도보순례를 원칙으로 했더라면 더 좋았을 듯하다. 부산의 우다다학교에서
진행하는 무전여행도 주목할 만한 교육과정이다. 경남 양산의 창조학교도
여행을 주요 교육과정으로 삼는다. 길이 어떤 학교보다 훌륭한 배움터일 수
있음을 증거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위탁형 학교처럼 ‘학교에 질린’ 아이
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일수록 이런 상상력이 필요할 것이다. 쇠이유나 오
이코텐의 걷기여행은 말하자면 유럽식 백일학교라고 할 수 있다. 백일 동안
2천km를 걷는 것이 주요 교육과정인 셈이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아 2천km씩 걷기는 힘들지만, 전국을 돌면서 아이들
이 한 번쯤 만나보면 좋을 분들을 만나면서 걷는다면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도 있다. 꼭 알려진 스승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에게 스승이 되어줄 수 있는
지혜롭고 자비로운 이들이 곳곳에 있다. 농사를 짓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가 어쩌면 누구보다 훌륭한 스승이 되어주실 수도 있다. 이야기를 나누고
일을 거들기도 하면서 걷다보면 아마 백일 동안 걷는 거리는 1천km 남짓
되겠지만 아이들의 변화는 더 클지도 모른다. 공동체 운동을 하는 분들 중
에도 부탁을 하면 기꺼이 선생 역할을 맡아줄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지
리적 여건은 좋지 않더라도 우리의 장점을 살려볼 일이다.
학 교 화 된 걷 기 , 국 토 순 례
어떤 목표를 정하고 걸으면 걷기를 제대로 즐기기가 어렵다. 마음 상태가
목표지향적으로 되어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기가 힘들어진다. 더욱이
국토순례 같이 무리지어 걸으면 앞사람을 좇아서 습관적으로 발걸음을 옮
기게 된다. 수십 수백 명이 줄지어 어디서 어디까지 걷는 행위는 교실이나
강당에 모여 앉아 강의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 자기 리듬대로 학습하지 못
하고 진도를 따라가듯이 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국토순례가 학교 교육과정
으로 편입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그 걷기 행위가 학교화되어 있음을 반증
한다. 주어진 교육과정이 있고, 진도도 정해져 있고, 집단적으로 따라야 하
는 것은 학교나 군대가 선호하는 방식이다.
국토순례는 사실상 군인들의 행군과 유사하다. 무리지어 하루에 수십 킬
로미터를 걸어서 이동하는 행군은 신체 단련과 정신력 강화에는 도움이 되
겠지만 걷는 행위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다양한 선물은 놓치기 십상이다.
국토순례라는 커리큘럼의 일반적인 교육목표를 들자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성취감을 맛보게 하는 것이 주요 목표일 것이다. 이른바 극기훈련인 셈이다.
성취감과 함께 고난이 끝난 뒤의 평화로움을 맛볼 수 있는 장점은 있겠지
만, 아이들의 성장을 위한 교육과정으로서는 아쉬운 점이 많다.
오이코텐에서 하는 걷기여행이나 우다다학교에서 시도한 무전여행은 여
행 코스를 청소년들이 스스로 선택하게 하고, 거기에 따르는 책임도 스스
로 지게 한다는 점에서 학교식 국토순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집단적인
교육과정이 아니라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맞는 개별화된 교육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국토순례처럼 앞사람 뒤꼭지만 바라보며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
려 애쓰면서 걷다 보면 눈길을 끄는 풍경이나 나무가 있어도 멈춰 서서 물끄
러미 바라볼 수 없다. 걷기여행의 진미는 길에서 처음 만나는 벌레나 새에
눈길을 뺏기기도 하고,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과 서로 도움을 주
고받기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 데 있다.
둘 또는 서너 명이 먼 길을 함께 걷더라도 저마다 홀로 걷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홀로 걷는 길이야말로 자기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야기를 나누면서 걷기, 말없이 함께 걷기, 홀로 사색에 잠겨 걷기, 아무런
생각 없이 순간순간 자신의 발걸음을 자각하며 걷기, 풍경을 감상하며 걷
기, 풍경 속으로 스며들며 걷기…. 이 모든 걷기는 상당히 다른 경험으로 우
리에게 다가온다.
해병대 캠프처럼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이른바 극기훈련들은 자기
를 강화하는 훈련이지 넘어서는 훈련이 아니다.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의
미에서 극기와는 정반대 방향인 셈이다. 극기훈련 식으로 걷게 하는 것은
걷기의 즐거움을 앗아갈 뿐만 아니라 걷기에 대한 나쁜 추억을 갖게 만들
기 쉽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식의 자신감은 며칠만 지나면 흔적 없이 사라
지지만 이런 기억은 몸에 각인된다. 몸이 걷기를 즐거운 경험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린 시절 그 한 가지만 몸이 제대로 기억해도 아이의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을 배운 것이다.
아 이 들 을 걷 게 하 자
걷는 것만으로도 많은 문제가 풀린다. 두 발로 걷는 행위는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든 가장 원초적인 몸놀림이다. 많이 걸으면 저절로 인간다워진다.
인성교육이니 상담이니, 복잡한 기술을 고민할 필요도 없다. 중화고등학교
방승호 교장이 문제를 안고 있는 학생들에게 산책을 자주 권하는 것은 매
우 훌륭한 교육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 스스로 문제의 본질을 볼 수 있
게 돕는 것이다. 당신 스스로도 고민거리가 있으면 늘 산책을 한다고 한다.
걷다 보면 해결책이 떠오른다. 걷기는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우면서 놀라운 해법이다. 제대로 걸으면 웬만한 병도 다
낫는다. 굳이 걷기여행을 하지 않더라도 일상 속에서 즐겨 걷는 것이야말로
잘 사는 지름길일지 모른다. 아무쪼록 길과 친해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