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무엇일까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삼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장되고, 젊은 병사는 군대에서 집단 폭행으로 맞아죽었으며, 집을 나와 성매매를 하던 십대 소녀는 한 젊은이와 또래 친구들의 잔인한 가혹 행위 끝에 목숨을 잃고 암매장을 당한다. 읽기에도 끔찍한 온갖 단어들로 도배되는 뉴스를 보며, ‘인간이란 정말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이 머릿속을 맴돈다.
교사가 되고 나서, 사춘기를 앓으며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중딩들과 뒤엉켜 살면서 나는 진심으로 ‘인간이란 존재’가 궁금했다. 교육은, 더구나 대안교육은 생각보다 어려웠고 배움과 성장이란 교실 안 수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밤잠을 설치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변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아이들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그런 질문들을 던져야만 했다. 경험이 부족한 초짜 교사는 아이를 다그치는 부모에게 “기다려주어야 한다”고 조언하면서도 정작 자신 안에 그런 확신이 있지는 않았다. (그 확신은, 기다려주면 저절로 자라는 수백 명의 아이들을 10년 정도 경험하고 나서야 생겼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상처를 주고받는 갈등 상황 앞에서 “입장을 바꿔 생각해야지” 하는 말만으로는 도저히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공감 능력’이란 것이 어떻게 교육으로 실현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미국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수잔 손택이 쓴 『타인의 고통』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이 말은 배려, 공동체, 협력, 사랑 같은, 의심할 여지없이 옳다고 전제하던 가치와 그 행위들에 숱한 물음을 던졌고, 나는 “이 아이들을 어쩌면 좋을까” 하는 고민을 거두어들이고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로 화두를 바꾸어 아이들 교육과 상관없이 방학 때면 평택 대추리나 밀양, 강정 ‘그런 델’ 열심히 찾게 되었다.
내가 종북이라거나 투철한 연대의식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고, 철저히 개인화된 타인의 고통을 내 것으로 가져오기 어렵다면 적어도 ‘그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위안을 얻지 않기 위해’ 한 공간에 서는 경험이 중요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니들은 우짤끼고!”
밀양 송전탑 현장에 내려가 있을 때였다. 공사장 입구에 앉아 계시다가 맥도 못 추고 달랑 들려나오기를 반복하시던 할머니는 경찰들이 달려들어 억세게 사지를 붙잡자, 잘 펴지지 않는 무릎이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지만 그들은 눈 하나 깜짝 않았다. 손주 같은 젊은이들에게 들려나오면서 할머니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다. “이놈들아. 다 늙은 우리는 죽으면 그만이다! 이 귀신 같은 땅에 남아서 니들은 우짤끼고! 니 새끼들 우짤라꼬!” 가슴을 치던 할머니는 기진맥진해 길바닥에 드러누운 채 일어나질 못하셨다. 할머니와 함께 질질 끌려나온 나도 그 남루한 몸 위에 엎어져 그만 울고 말았다.
경찰이 우리를 삥 둘러싸고 내려다보고 있는데, 할머니는 숨을 쉴 수가 없다며 명치를 문질러 달라고 하셨다. 송전탑 들어서고 화병이 생겨서, 잠이 안 오고 먹은 것이 소화도 안 된다고. 한 손으로는 할머니의 야윈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명치부터 배까지 살살 쓸어내리는데 할머니는 눈을 감으신 채 말씀하셨다. “십 원도 필요 없다. 그깟 돈 다 처먹고 죽으라고 해!” 나지막했지만 슬프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무자비한 국가의 폭력 앞에 욕심 없이 살아온 한 노인의 인생이 이토록 서글플 수가 있나 싶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미안해서 또 오겠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있는데, 할머니는 “지랄 맞은 뉴스 놈들은 외부세력 어쩌고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주는 니들 때문에 산다”고 오히려 위로를 건네셨다.
집에 돌아와서도 단호하고도 슬펐던 할머니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해서 마음이 편칠 않았다. 할머니는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스스로 ‘외부세력’인 것 같았다. 무언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우선시되는 일들로 바빴고 밀양은 내 일상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뉴스를 뒤지거나, 후원금을 내거나, 콘센트를 뽑거나 할 뿐, 그곳에서 오롯이 삶을 살아내는 분들에 빗댈 수가 없었다. 수잔 손택의 말처럼 이미 ‘타인의 고통’이라고 인지하는 순간, 그것은 도저히 이해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절대적 개인성을 띤 당사자 고유의 것이어서 내 것이 될 수는 없었다.
현실이 냉정할수록 나는 그들과 연결되어 있고 싶었다. 이따금 현장을 찾았던 그 단발의 경험들을 선으로 연결해서 내가 목격하지 못한 고통의 시간들을 상상했다. 그 상상 또한 실제와는 많이 다를 테지만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또 다른 오해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되, 보이지 않는 너머의 것을 생각하며 세상과 그물망을 엮어갔다. 저건 어디에서 왔을까, 저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 사람의 마음은 지금 어떨까, 그렇게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며 남들에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라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렇게 되는 변화를 경험하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사람의 감정은 변하기 쉬운 것이어서, 타인에 대한 연민 또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곧 시들해진다. 우리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시민기록모임을 만들고, 노란 리본을 가방에 매달고, 다이어리에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스티커를 붙이거나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드는
것도 망각하는 존재의 어리석음을 넘어 ‘타인에 대한 연민’을 이어가려는 눈물겨운 노력일 것이다. 그래서 자꾸자꾸 반복해서 보는 것,
보이지 않는 과정을 보려고 애쓰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사람이 지닌 다섯 가지 감각은 의사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그중에서 시각은 87%, 청각은 7%, 촉각은 3%, 후각 2%, 그리고 미각은 1%의 의사결정력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니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어린 아기들이 까꿍 놀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대상영속성’이 길러지지 않았기 때문인데, 어려서는 엄마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불안해하며 울다가 좀더 자라 대상영속성이 생기면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으로도 엄마가 있다는 걸 알고 안심하게 된다. 자라면서 그 아이가 대상영속성을 제대로 습득했다면 아마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은 시간과 공간을 점점 확장해갔을 것이다. 지나간 일과 오지 않은 일 사이에 서 있는 현재의 자기를 알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예전에, 도시에서 온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자연캠프를 했던 적이 있는데 축사 앞을 지나며 어미에게 매달려 젖을 빠는 송아지를 보고는 한 아이가 “저것 봐!”라고 외쳤다. 귀엽다거나, 신기하다거나 이런 말이 이어질 걸 예상하며 ‘동물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난 아이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이어진 아이의 외침은 “맛있겠다, 한우!”였다. 그 뒤에 덧붙이는 말은 슬프기까지 했다. “근데, 완전 비싸겠지?” 아, 우리는 이 아이에게 뭐라 말해줄 수 있을까. 아이를 탓할 일이 아니다. 이 아이는 삼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물속에서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서도, 이제 지겨우니 그만하라는 어른들과 같은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보고 듣고 판단하는 모든 것이 개인의 자유의지이니 생각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궁금해지기는 한다. 우리는 도대체 무얼 어떻게 보면서 살아가고있는 걸까. 그런 면에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라는 말은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남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틀렸다면 수정할 마음가짐을 준비하고, 몰랐다면 더 알고 싶은 호기심을가지며 사람은 겸손해질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대상의 영속성은 일상에서 확인된다. 먹고 있는 음식뿐만 아니라 입고 있는 옷, 휴대폰 같은 것들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보이지 않는 그 너머를 좇아가다 보면 하루하루 타인의 수고와 고통 위에 내 삶이 얹혀 있음을 깨닫는다. 그 민폐를 최소화하려면 먼저 사람들의 극대화된 욕심부터 줄여야 하지 않을까. 불어나는 욕망을 내버려둔 채 대체재 개발에만 몰두하는 것이 해결책인 것 같지는 않다. 재생가능에너지를 위해 태양광 모듈 만드는 것에도 자원과 에너지가 들어가고, 세상 곳곳에는 썩지 않는 플라스틱 폐기물이 남게 된다.
전기와 석유 없이 살아보겠다고 동백 숲으로 들어간 젊은 부부가 있다. 이 부부는 냉장고도, 컴퓨터도 없이 숲 속에서 살며 스스로 식의주를 해결해가고 있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 방문자가 태양광을 공짜로 설치해 주겠다고 했단다. 진심으로 자신들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거절하기도 조심스러웠지만 결국 두 번이나 사양을 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인상 깊다. 자신도 보통 사람과 같아서 전기가 더 생산되면 더 쓰고 싶을 거라고. 소비의 욕망을 줄이지 않은 채 ‘대체용’만 만들어내려는 대안에너지는 그리 대안적이지 않은 것 같다고. 소형 태양광발전기를 이미 사용하고 있는데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사용하지 못하지만, 그걸로 비상시 랜턴도 쓰고, 책도 읽을 수 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휴대폰 충전을 위한 소형 태양광 발전기가 본인들 삶을 위해 허락한 최소이자 최선이라는 이 부부의 말에 이 현란한 불빛 아래 살고 있는 나에겐, 우리에겐 어느 정도가 충분한 것일까 생각해본다. ‘최소’와 ‘최선’이 동일시되는 그 삶의 철학에 깊은 감동이 전해졌다.
작은 사람들이 모여
지난주 한국에 다녀간 일본 도쿄의 슈레대학 사람들이 전해준 후쿠시마 이야기를 들었다. 다들 버리고 떠난 후쿠시마 땅에서 삶을 다시 일궈보겠다고 돌아간 사람들을 슈레대학에서 돕고 있다고 했다. 전 지역이 오염된 건 아니어서 엄격한 절차를 걸쳐 그곳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유통해 먹는다고 했다. 놀랍고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인류가 엎지른 이 끔찍한 오물을 치우려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 한편 고맙고 감동적이었다.
방사능 공포에 사로잡혀 원산지 확인에 열을 올리며 제 몸 사리기에만 급급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든 인류가 만들어낸 이 재앙을 함께 나누어 책임지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돌이킬 수 없어 여기까지 왔지만 더 나아가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지는 못할지라도 발밑에 엎드려 걸레질이라도 하겠다는 사람들, 불안하고 무섭지만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지’ 지혜를 모아가려는 사람들, 그들이 모여서 저마다 만든 점들을 연결해 보이지 않는 ‘타인의 고통’을 함께 그려나간다면 일과를 마친 저녁, 식탁에 둘러 앉아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도 더 많아질 것이다.
어린 자식을 잃은 부모가 가슴에 피멍이 들어 길바닥에서 곡기를 끊어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경제를 살리려면 슬퍼할 사이도 없다고 닦달하는 사회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타인의 고통’, 그 절대적 거리를 충분히 슬퍼하는 일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언제나 힘없고 약한 이들이 ‘연민’으로 잡은 손을 결코 놓지 않으며 오늘을 지켜왔다. 앞으로도 낮은 곳에 있는 이 평범한 사람들이 애도하고 분노하고 서로를 위로하며 도무지 내 것이 될 수 없는 누군가의 고통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이어갈 것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하는 여전한 물음을 안고.
때로는 너무 환한 빛 때문에 앞이 안 보이기도 한다. 길을 찾기 위해 우리는 어쩌면, 조금 더 어둡게 살아야 할 것도 같다.
장희숙 (민들레 편집장)

인간이란 무엇일까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삼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장되고, 젊은 병사는 군대에서 집단 폭행으로 맞아죽었으며, 집을 나와 성매매를 하던 십대 소녀는 한 젊은이와 또래 친구들의 잔인한 가혹 행위 끝에 목숨을 잃고 암매장을 당한다. 읽기에도 끔찍한 온갖 단어들로 도배되는 뉴스를 보며, ‘인간이란 정말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이 머릿속을 맴돈다.
교사가 되고 나서, 사춘기를 앓으며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중딩들과 뒤엉켜 살면서 나는 진심으로 ‘인간이란 존재’가 궁금했다. 교육은, 더구나 대안교육은 생각보다 어려웠고 배움과 성장이란 교실 안 수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밤잠을 설치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변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아이들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그런 질문들을 던져야만 했다. 경험이 부족한 초짜 교사는 아이를 다그치는 부모에게 “기다려주어야 한다”고 조언하면서도 정작 자신 안에 그런 확신이 있지는 않았다. (그 확신은, 기다려주면 저절로 자라는 수백 명의 아이들을 10년 정도 경험하고 나서야 생겼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상처를 주고받는 갈등 상황 앞에서 “입장을 바꿔 생각해야지” 하는 말만으로는 도저히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공감 능력’이란 것이 어떻게 교육으로 실현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미국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수잔 손택이 쓴 『타인의 고통』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이 말은 배려, 공동체, 협력, 사랑 같은, 의심할 여지없이 옳다고 전제하던 가치와 그 행위들에 숱한 물음을 던졌고, 나는 “이 아이들을 어쩌면 좋을까” 하는 고민을 거두어들이고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로 화두를 바꾸어 아이들 교육과 상관없이 방학 때면 평택 대추리나 밀양, 강정 ‘그런 델’ 열심히 찾게 되었다.
내가 종북이라거나 투철한 연대의식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고, 철저히 개인화된 타인의 고통을 내 것으로 가져오기 어렵다면 적어도 ‘그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위안을 얻지 않기 위해’ 한 공간에 서는 경험이 중요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니들은 우짤끼고!”
밀양 송전탑 현장에 내려가 있을 때였다. 공사장 입구에 앉아 계시다가 맥도 못 추고 달랑 들려나오기를 반복하시던 할머니는 경찰들이 달려들어 억세게 사지를 붙잡자, 잘 펴지지 않는 무릎이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지만 그들은 눈 하나 깜짝 않았다. 손주 같은 젊은이들에게 들려나오면서 할머니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다. “이놈들아. 다 늙은 우리는 죽으면 그만이다! 이 귀신 같은 땅에 남아서 니들은 우짤끼고! 니 새끼들 우짤라꼬!” 가슴을 치던 할머니는 기진맥진해 길바닥에 드러누운 채 일어나질 못하셨다. 할머니와 함께 질질 끌려나온 나도 그 남루한 몸 위에 엎어져 그만 울고 말았다.
경찰이 우리를 삥 둘러싸고 내려다보고 있는데, 할머니는 숨을 쉴 수가 없다며 명치를 문질러 달라고 하셨다. 송전탑 들어서고 화병이 생겨서, 잠이 안 오고 먹은 것이 소화도 안 된다고. 한 손으로는 할머니의 야윈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명치부터 배까지 살살 쓸어내리는데 할머니는 눈을 감으신 채 말씀하셨다. “십 원도 필요 없다. 그깟 돈 다 처먹고 죽으라고 해!” 나지막했지만 슬프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무자비한 국가의 폭력 앞에 욕심 없이 살아온 한 노인의 인생이 이토록 서글플 수가 있나 싶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미안해서 또 오겠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있는데, 할머니는 “지랄 맞은 뉴스 놈들은 외부세력 어쩌고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주는 니들 때문에 산다”고 오히려 위로를 건네셨다.
집에 돌아와서도 단호하고도 슬펐던 할머니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해서 마음이 편칠 않았다. 할머니는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스스로 ‘외부세력’인 것 같았다. 무언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우선시되는 일들로 바빴고 밀양은 내 일상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뉴스를 뒤지거나, 후원금을 내거나, 콘센트를 뽑거나 할 뿐, 그곳에서 오롯이 삶을 살아내는 분들에 빗댈 수가 없었다. 수잔 손택의 말처럼 이미 ‘타인의 고통’이라고 인지하는 순간, 그것은 도저히 이해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절대적 개인성을 띤 당사자 고유의 것이어서 내 것이 될 수는 없었다.
현실이 냉정할수록 나는 그들과 연결되어 있고 싶었다. 이따금 현장을 찾았던 그 단발의 경험들을 선으로 연결해서 내가 목격하지 못한 고통의 시간들을 상상했다. 그 상상 또한 실제와는 많이 다를 테지만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또 다른 오해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되, 보이지 않는 너머의 것을 생각하며 세상과 그물망을 엮어갔다. 저건 어디에서 왔을까, 저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 사람의 마음은 지금 어떨까, 그렇게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며 남들에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라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렇게 되는 변화를 경험하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사람의 감정은 변하기 쉬운 것이어서, 타인에 대한 연민 또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곧 시들해진다. 우리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시민기록모임을 만들고, 노란 리본을 가방에 매달고, 다이어리에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스티커를 붙이거나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드는
것도 망각하는 존재의 어리석음을 넘어 ‘타인에 대한 연민’을 이어가려는 눈물겨운 노력일 것이다. 그래서 자꾸자꾸 반복해서 보는 것,
보이지 않는 과정을 보려고 애쓰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사람이 지닌 다섯 가지 감각은 의사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그중에서 시각은 87%, 청각은 7%, 촉각은 3%, 후각 2%, 그리고 미각은 1%의 의사결정력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니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어린 아기들이 까꿍 놀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대상영속성’이 길러지지 않았기 때문인데, 어려서는 엄마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불안해하며 울다가 좀더 자라 대상영속성이 생기면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으로도 엄마가 있다는 걸 알고 안심하게 된다. 자라면서 그 아이가 대상영속성을 제대로 습득했다면 아마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은 시간과 공간을 점점 확장해갔을 것이다. 지나간 일과 오지 않은 일 사이에 서 있는 현재의 자기를 알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예전에, 도시에서 온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자연캠프를 했던 적이 있는데 축사 앞을 지나며 어미에게 매달려 젖을 빠는 송아지를 보고는 한 아이가 “저것 봐!”라고 외쳤다. 귀엽다거나, 신기하다거나 이런 말이 이어질 걸 예상하며 ‘동물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난 아이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이어진 아이의 외침은 “맛있겠다, 한우!”였다. 그 뒤에 덧붙이는 말은 슬프기까지 했다. “근데, 완전 비싸겠지?” 아, 우리는 이 아이에게 뭐라 말해줄 수 있을까. 아이를 탓할 일이 아니다. 이 아이는 삼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물속에서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서도, 이제 지겨우니 그만하라는 어른들과 같은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보고 듣고 판단하는 모든 것이 개인의 자유의지이니 생각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궁금해지기는 한다. 우리는 도대체 무얼 어떻게 보면서 살아가고있는 걸까. 그런 면에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라는 말은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남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틀렸다면 수정할 마음가짐을 준비하고, 몰랐다면 더 알고 싶은 호기심을가지며 사람은 겸손해질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대상의 영속성은 일상에서 확인된다. 먹고 있는 음식뿐만 아니라 입고 있는 옷, 휴대폰 같은 것들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보이지 않는 그 너머를 좇아가다 보면 하루하루 타인의 수고와 고통 위에 내 삶이 얹혀 있음을 깨닫는다. 그 민폐를 최소화하려면 먼저 사람들의 극대화된 욕심부터 줄여야 하지 않을까. 불어나는 욕망을 내버려둔 채 대체재 개발에만 몰두하는 것이 해결책인 것 같지는 않다. 재생가능에너지를 위해 태양광 모듈 만드는 것에도 자원과 에너지가 들어가고, 세상 곳곳에는 썩지 않는 플라스틱 폐기물이 남게 된다.
전기와 석유 없이 살아보겠다고 동백 숲으로 들어간 젊은 부부가 있다. 이 부부는 냉장고도, 컴퓨터도 없이 숲 속에서 살며 스스로 식의주를 해결해가고 있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 방문자가 태양광을 공짜로 설치해 주겠다고 했단다. 진심으로 자신들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거절하기도 조심스러웠지만 결국 두 번이나 사양을 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인상 깊다. 자신도 보통 사람과 같아서 전기가 더 생산되면 더 쓰고 싶을 거라고. 소비의 욕망을 줄이지 않은 채 ‘대체용’만 만들어내려는 대안에너지는 그리 대안적이지 않은 것 같다고. 소형 태양광발전기를 이미 사용하고 있는데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사용하지 못하지만, 그걸로 비상시 랜턴도 쓰고, 책도 읽을 수 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휴대폰 충전을 위한 소형 태양광 발전기가 본인들 삶을 위해 허락한 최소이자 최선이라는 이 부부의 말에 이 현란한 불빛 아래 살고 있는 나에겐, 우리에겐 어느 정도가 충분한 것일까 생각해본다. ‘최소’와 ‘최선’이 동일시되는 그 삶의 철학에 깊은 감동이 전해졌다.
작은 사람들이 모여
지난주 한국에 다녀간 일본 도쿄의 슈레대학 사람들이 전해준 후쿠시마 이야기를 들었다. 다들 버리고 떠난 후쿠시마 땅에서 삶을 다시 일궈보겠다고 돌아간 사람들을 슈레대학에서 돕고 있다고 했다. 전 지역이 오염된 건 아니어서 엄격한 절차를 걸쳐 그곳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유통해 먹는다고 했다. 놀랍고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인류가 엎지른 이 끔찍한 오물을 치우려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 한편 고맙고 감동적이었다.
방사능 공포에 사로잡혀 원산지 확인에 열을 올리며 제 몸 사리기에만 급급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든 인류가 만들어낸 이 재앙을 함께 나누어 책임지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돌이킬 수 없어 여기까지 왔지만 더 나아가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지는 못할지라도 발밑에 엎드려 걸레질이라도 하겠다는 사람들, 불안하고 무섭지만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지’ 지혜를 모아가려는 사람들, 그들이 모여서 저마다 만든 점들을 연결해 보이지 않는 ‘타인의 고통’을 함께 그려나간다면 일과를 마친 저녁, 식탁에 둘러 앉아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도 더 많아질 것이다.
어린 자식을 잃은 부모가 가슴에 피멍이 들어 길바닥에서 곡기를 끊어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경제를 살리려면 슬퍼할 사이도 없다고 닦달하는 사회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타인의 고통’, 그 절대적 거리를 충분히 슬퍼하는 일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언제나 힘없고 약한 이들이 ‘연민’으로 잡은 손을 결코 놓지 않으며 오늘을 지켜왔다. 앞으로도 낮은 곳에 있는 이 평범한 사람들이 애도하고 분노하고 서로를 위로하며 도무지 내 것이 될 수 없는 누군가의 고통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이어갈 것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하는 여전한 물음을 안고.
때로는 너무 환한 빛 때문에 앞이 안 보이기도 한다. 길을 찾기 위해 우리는 어쩌면, 조금 더 어둡게 살아야 할 것도 같다.
장희숙 (민들레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