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특별히 더 위험한 걸까
노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신종 부업이 ‘초등학생 등하교 도우미’라고 한다. 하루에 한두 시간 부모 대신 아이를 안전하게 등하교시키는 이 일은 체력적으로 크게 힘들지 않고 그에 비해 시급이 높은 편이라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는데, 맞벌이 부부 중에 원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 울 정도란다. 이렇게까지 아이의 일상을 돌보지 못하면서 직장 생활에 뛰어 들어야 하는 부모 마음이 오죽할까 싶기도 하고, 한편 아이들 스스로는 한 발짝도 내딛을 수 없을 만큼 정말 우리 사회가 그렇게 위험해졌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에 따르면, 과거에는 ‘인간의 존재 조건이 의식을 규정한다’고 여겨왔지만 이 시대에는 ‘의식이 인간 존재를 규정’하게 되었다. ‘위험하다’는 의식이 우리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산발적인 사고가 각종 미디어와 촘촘한 네트워크를 통해 일시에 알려지면서 위험에 대한 인식 또한 순식간에 확산되는 사회가 되었다. 이번 세월호 참사 때 드러났듯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언론의 보도 방식도 ‘위험의 실체’를 부풀리거나 극단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어린 딸아이를 둔 젊은 아빠가 군대에서 발생한 폭력 사망사고를 보고는 ‘아들이 아니라 다행’이라며 안도하다가, 다음 날 여중생 성폭행 뉴스를 보고 다시 가슴이 철렁한다는 식이다. 이런 사회를 살면서 불안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고, 제 자식을 단속하지 않으면 무책임한 부모라고 여겨지는 정체불명의 ‘위험사회’가 담론을 통해 구성되면서, 우리는 실제로 위험을 ‘경험’하는 것보다,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경우가 더 많게 되었다.
극대화되고 부풀려진 위험은 우리 삶의 어두운 그늘로 들어와 ‘위협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불안을 채근하는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존재는 자신뿐인 부모들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어디든 따라다니고, 자신이 그 곁을 지킬 수 없는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면 기술의 힘을 빌리게 된다. 아이를 보모에게 맡기고 출근한 뒤 집안에 설치한 CCTV를 지켜보거나, 위치 추적과 등하교 알림문자로 아이의 동선을 일일이 확인하고, 앱으로 아이의 스마트폰을 통제하면서 말이다. 학원이든 책방이든 지역아동센터든 아이가 가는 곳마다 도착하면 문자를 달라고 요청하는 부모들이 있을 정도로 아이의 동선을 확인하는 것이 익숙한 문화가 되었다.
부모 입장에서는 이런 것들이 모두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지만, 하는 행동마다 어른들에게 확인 받아야 하는 아이들 마음은 어떨까. 딴 길로 새지 말아야 하고 정해진 동선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력에 한참 왕성한 호기심을 접고, 부모가 원하는 대로 집-학교-학원만 뱅뱅 돌게 되지는 않을까.
험난한 세상에 아이를 마냥 내버려둘 수도 없지만 ‘안전을 지켜주고 싶은 어른들의 행위’는 ‘보호’와 ‘감시’ 사이,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위험’을 규정하는 범위가 사람마다 다르다 보니, 어떤 부모에게는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 친구 사이에 못 어울리는 것, 좋은 대학에 못 가고, 좋은 직장에 못 다니는 것, 시시한 결혼 상대를 만나는 것까지가 모두 ‘위험 요소’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지나친 책임감 속에는 아이의 삶을 제어하고 통제할 권리가 부모 자신에게 있다는 착각이 혼재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면의 세계가 자라는 시간
‘자식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이어져온 부모들의 심리다. 이전 세대 부모가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기껏해야 아이 몰래 일기장을 들추거나,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를 훔쳐보고, 전화 통화를 엿듣는 정도였다. 그러다 뭔가 통제해야 할 행동이 레이더망에 잡히면 소리를 지르거나 매를 들고, 그래도 안 되면 강제로 머리를 빡빡 밀거나, 라푼젤처럼 방에 가두어 못 나가게 하는 폭력적인 방법을 썼는데, 그 이유는 다만 그것보다 세련되고 교양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은 세밀하고 정교하게 발달한 기술이 부모들의 ‘알고 싶은 욕구, 통제하고 싶은 욕구’를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는 덕분에 예전처럼 무식한 방법을 쓰지 않아도 자녀를 다스리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아이의 생각이나 의지를 바꾸었다’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욕구는 금지할수록 상승하며, 그 틈을 빠져 나가는 방법이 혁신적으로 진화할 뿐이다.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음을 아는 아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기도 모르게 ‘타인의 관점’에서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호기심은 타협으로 변형되어서, “내가 이것을 궁금해 하는가”와 같은 질문보다는 “어떻게 하면 ‘실세’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순종적이고 착한 아이들일수록 자기 욕구를 감추고, 지켜보는 어른이 만족할 만한 욕구에 자신을 맞춘다. 지켜보는 이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어른들의 눈길을 교묘히 피한 아이들에게는 뭔가 대단한 일탈이 있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별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친한 친구를 불러서 놀거나 밤늦게까지 마음껏 텔레비전을 보거나 할 뿐인데, 그냥 어른이란 존재가 없다는 자체만으로도 아이들은 신이 나고 그런 아이들을 보며 어른은 불안해한다. 특별히 무엇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시선으로부터 차단되어 오롯이 혼자 있을 때의 평화로움이나 해방감을 느끼면서 아이들의 창의성과 상상력은 넓어지고 깊어진다.
고독의 시간을 방해받지 않은 어린아이를 본 적이 있는가. 엄마와 산책을 하던 다섯 살짜리 아이가 해 저무는 강가에 말없이 앉아 있기도 하고,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중학교 1학년이나 된 아이들이 시골에 있는 대안학교에 입학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뒷산에 올라가 수풀을 헤치고 땅굴을 파서, ‘어른들이 모르는’ 자기들만의 아지트를 만드는 것이다. 네댓 살 된 아이가 혼자 중얼거리는 걸 두고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부모들도 많은데, 그건 내면에서 인간관계를 일구고 있는 중이라 심하지 않다면 방해하지 말고 두어야 한다. 일인다역에도 능한 이 ‘내면의 독백’은 현실에서 미처 풀지 못한 대화를 연습하는, 지극히 당연한 발달 과정이다. 그렇게 어른들 눈을 피해서, 부모들이 안 볼 때 아이들 내면의 세계는 무럭무럭 자란다.
어른들이 그렇게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고유한 내면은 안타깝게도 어른이 간섭하지 않는 자리에 존재한다.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내면’을 형성하기 위해 아이들은 틈만 나면 자기들만의 공간과 시간을 열심히 찾는다. 넓은 곳을 놔두고 구석에 ‘짱박혀서’ 노는 어린이들의 이런 은밀한 심리를 잘 알고 있던 건축가 정기용 씨는 기적의 도서관을 설계할 때 곳곳에 숨어들어갈 수 있는 동굴 같은 공간을 만들어 공공기관에서도 아이들의 사적인 영역이 필요하다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참 신기하게도, 어릴 적 뛰어놀던 기억을 아무리 뒤적여도 그 속엔 아이들밖에 없다. 어른들은 밭에 있거나, 가게에 있거나, 회사에 있거나, 제 할 일을 열심히 할 뿐이었고, 아이들은 저들끼리 모여 놀다가 싸움박질도 하고, 그러다 화해하기도 하면서 해가 지도록 뛰어놀며 자랐다. 그런데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놀이터 풍경은 놀이 기구 주변으로 어른들이 빙 둘러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틈틈이 아이들을 힐끔거리는 것이다. 아이의 행동이 포위망에 걸려들었을 때 던지는 지시어는 주로 뭘 하지 말라는 소리인데, “(더러우니) 눕지 마!”, “(위험하니) 뛰지 마!”, “(친구와) 싸우지 마!” 같은 말 속에 아이들에게 허용되는 건 딱 한 가지다. “재밌게 놀라” 는 것(아무 것도 안 하면서 재밌기란, 참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다). 때로는 아이들 노는 것을 지켜보다가 “왜 쟤랑은 안 놀아. 같이 사이좋게 놀아야지!” 하 면서 아이들 관계에 적극 개입하는 부모도 있다. 소외된 아이 없이 두루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선의의 교육적 접근이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이 또한 맘대로 놀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 요소일 뿐이다.
일러스트(혜빈)
제 삶을 살아보게 내버려두기
항상 어른이 곁에서 버티고 있어야 할 것처럼 연약해 보이는 존재지만, 아이들은 생각보다 용감하고 생각보다 스스로를 지켜내는 힘이 강하다. 오히려 어른이 없을수록 아이는 자기 삶에 책임감을 느끼며, 위험 상황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줄 안다. 내가 여행길에서 만난 아이들, 동생을 데리고 강가에 나와 제 손으로 빨래를 하던 필리핀 소녀나 히말라야 중턱에서 야크 떼를 진두지휘하던 네팔의 여덟 살 소년은 어린 나이에도 ‘제 역할’을 해내는 위풍당당함을 보여주었다. 이 아이들은 스스로 삶을 살아 갈 기회를 얻었고 그 능력을 한껏 발휘하는 것뿐인데, 과잉보호 문화에 익숙한 타국의 어른이 지레 연민의 눈으로 ‘아이고, 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하고 바라볼 뿐이었다. 서른이 넘은 딸의 회사에서 내준 숙제를 아버지가 대신 해주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니 말이다.
살다보면 그리워지는 어린 시절이 있다. 내겐 혼자 돌아오는 하굣길이 그렇다. 버스에 내려서도 삼십 분 넘게 걸어 들어가야 했던, 어린아이에게는 너무 먼 시골길이었다. 버스를 잘못 타서 눈물을 쏟기도 하고, 차비를 잃어버려 두어 시간 걸어오기도 하고, 집에 도착할 시간을 계산해 머릿속으로 한편의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하면서, 험난한 세상에 혼자 서는 법을 배웠다. 어른이 되고 보니,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학교를 오가면서 보냈던 그 혼자만의 시간이 내겐 빛나는 삶의 보물이 되었다.
요즘 세상에 혼자 먼 길을 걸어본 아이가 있을까.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자기의 무게를 등에 지어본 아이가 있을까. 학원 뺑뺑이 도는 것 말고, 어른의 허락을 구해야 하는 정해진 놀이 말고, 어른이 된 이 아이들에게는 어린 시절의 어떤 기억이 남아 있을까.
아이들을 옭아매는 현실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다. 지금은 어른들의 숨 막히는 통제에 발버둥 치며 저항이라도 하지만, 언젠가는 그것에 길들여진 아이들이 ‘놀고 싶은 마음’마저 잃게 되는 것이다. 어른이란 존재가 우뚝 서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요즘,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른이 사라진 그들만의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장희숙 (민들레 편집장)
지금이 특별히 더 위험한 걸까
노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신종 부업이 ‘초등학생 등하교 도우미’라고 한다. 하루에 한두 시간 부모 대신 아이를 안전하게 등하교시키는 이 일은 체력적으로 크게 힘들지 않고 그에 비해 시급이 높은 편이라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는데, 맞벌이 부부 중에 원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 울 정도란다. 이렇게까지 아이의 일상을 돌보지 못하면서 직장 생활에 뛰어 들어야 하는 부모 마음이 오죽할까 싶기도 하고, 한편 아이들 스스로는 한 발짝도 내딛을 수 없을 만큼 정말 우리 사회가 그렇게 위험해졌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에 따르면, 과거에는 ‘인간의 존재 조건이 의식을 규정한다’고 여겨왔지만 이 시대에는 ‘의식이 인간 존재를 규정’하게 되었다. ‘위험하다’는 의식이 우리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산발적인 사고가 각종 미디어와 촘촘한 네트워크를 통해 일시에 알려지면서 위험에 대한 인식 또한 순식간에 확산되는 사회가 되었다. 이번 세월호 참사 때 드러났듯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언론의 보도 방식도 ‘위험의 실체’를 부풀리거나 극단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어린 딸아이를 둔 젊은 아빠가 군대에서 발생한 폭력 사망사고를 보고는 ‘아들이 아니라 다행’이라며 안도하다가, 다음 날 여중생 성폭행 뉴스를 보고 다시 가슴이 철렁한다는 식이다. 이런 사회를 살면서 불안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고, 제 자식을 단속하지 않으면 무책임한 부모라고 여겨지는 정체불명의 ‘위험사회’가 담론을 통해 구성되면서, 우리는 실제로 위험을 ‘경험’하는 것보다,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경우가 더 많게 되었다.
극대화되고 부풀려진 위험은 우리 삶의 어두운 그늘로 들어와 ‘위협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불안을 채근하는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존재는 자신뿐인 부모들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어디든 따라다니고, 자신이 그 곁을 지킬 수 없는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면 기술의 힘을 빌리게 된다. 아이를 보모에게 맡기고 출근한 뒤 집안에 설치한 CCTV를 지켜보거나, 위치 추적과 등하교 알림문자로 아이의 동선을 일일이 확인하고, 앱으로 아이의 스마트폰을 통제하면서 말이다. 학원이든 책방이든 지역아동센터든 아이가 가는 곳마다 도착하면 문자를 달라고 요청하는 부모들이 있을 정도로 아이의 동선을 확인하는 것이 익숙한 문화가 되었다.
부모 입장에서는 이런 것들이 모두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지만, 하는 행동마다 어른들에게 확인 받아야 하는 아이들 마음은 어떨까. 딴 길로 새지 말아야 하고 정해진 동선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력에 한참 왕성한 호기심을 접고, 부모가 원하는 대로 집-학교-학원만 뱅뱅 돌게 되지는 않을까.
험난한 세상에 아이를 마냥 내버려둘 수도 없지만 ‘안전을 지켜주고 싶은 어른들의 행위’는 ‘보호’와 ‘감시’ 사이,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위험’을 규정하는 범위가 사람마다 다르다 보니, 어떤 부모에게는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 친구 사이에 못 어울리는 것, 좋은 대학에 못 가고, 좋은 직장에 못 다니는 것, 시시한 결혼 상대를 만나는 것까지가 모두 ‘위험 요소’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지나친 책임감 속에는 아이의 삶을 제어하고 통제할 권리가 부모 자신에게 있다는 착각이 혼재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면의 세계가 자라는 시간
‘자식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이어져온 부모들의 심리다. 이전 세대 부모가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기껏해야 아이 몰래 일기장을 들추거나,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를 훔쳐보고, 전화 통화를 엿듣는 정도였다. 그러다 뭔가 통제해야 할 행동이 레이더망에 잡히면 소리를 지르거나 매를 들고, 그래도 안 되면 강제로 머리를 빡빡 밀거나, 라푼젤처럼 방에 가두어 못 나가게 하는 폭력적인 방법을 썼는데, 그 이유는 다만 그것보다 세련되고 교양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은 세밀하고 정교하게 발달한 기술이 부모들의 ‘알고 싶은 욕구, 통제하고 싶은 욕구’를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는 덕분에 예전처럼 무식한 방법을 쓰지 않아도 자녀를 다스리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아이의 생각이나 의지를 바꾸었다’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욕구는 금지할수록 상승하며, 그 틈을 빠져 나가는 방법이 혁신적으로 진화할 뿐이다.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음을 아는 아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기도 모르게 ‘타인의 관점’에서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호기심은 타협으로 변형되어서, “내가 이것을 궁금해 하는가”와 같은 질문보다는 “어떻게 하면 ‘실세’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순종적이고 착한 아이들일수록 자기 욕구를 감추고, 지켜보는 어른이 만족할 만한 욕구에 자신을 맞춘다. 지켜보는 이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어른들의 눈길을 교묘히 피한 아이들에게는 뭔가 대단한 일탈이 있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별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친한 친구를 불러서 놀거나 밤늦게까지 마음껏 텔레비전을 보거나 할 뿐인데, 그냥 어른이란 존재가 없다는 자체만으로도 아이들은 신이 나고 그런 아이들을 보며 어른은 불안해한다. 특별히 무엇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시선으로부터 차단되어 오롯이 혼자 있을 때의 평화로움이나 해방감을 느끼면서 아이들의 창의성과 상상력은 넓어지고 깊어진다.
고독의 시간을 방해받지 않은 어린아이를 본 적이 있는가. 엄마와 산책을 하던 다섯 살짜리 아이가 해 저무는 강가에 말없이 앉아 있기도 하고,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중학교 1학년이나 된 아이들이 시골에 있는 대안학교에 입학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뒷산에 올라가 수풀을 헤치고 땅굴을 파서, ‘어른들이 모르는’ 자기들만의 아지트를 만드는 것이다. 네댓 살 된 아이가 혼자 중얼거리는 걸 두고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부모들도 많은데, 그건 내면에서 인간관계를 일구고 있는 중이라 심하지 않다면 방해하지 말고 두어야 한다. 일인다역에도 능한 이 ‘내면의 독백’은 현실에서 미처 풀지 못한 대화를 연습하는, 지극히 당연한 발달 과정이다. 그렇게 어른들 눈을 피해서, 부모들이 안 볼 때 아이들 내면의 세계는 무럭무럭 자란다.
어른들이 그렇게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고유한 내면은 안타깝게도 어른이 간섭하지 않는 자리에 존재한다.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내면’을 형성하기 위해 아이들은 틈만 나면 자기들만의 공간과 시간을 열심히 찾는다. 넓은 곳을 놔두고 구석에 ‘짱박혀서’ 노는 어린이들의 이런 은밀한 심리를 잘 알고 있던 건축가 정기용 씨는 기적의 도서관을 설계할 때 곳곳에 숨어들어갈 수 있는 동굴 같은 공간을 만들어 공공기관에서도 아이들의 사적인 영역이 필요하다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참 신기하게도, 어릴 적 뛰어놀던 기억을 아무리 뒤적여도 그 속엔 아이들밖에 없다. 어른들은 밭에 있거나, 가게에 있거나, 회사에 있거나, 제 할 일을 열심히 할 뿐이었고, 아이들은 저들끼리 모여 놀다가 싸움박질도 하고, 그러다 화해하기도 하면서 해가 지도록 뛰어놀며 자랐다. 그런데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놀이터 풍경은 놀이 기구 주변으로 어른들이 빙 둘러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틈틈이 아이들을 힐끔거리는 것이다. 아이의 행동이 포위망에 걸려들었을 때 던지는 지시어는 주로 뭘 하지 말라는 소리인데, “(더러우니) 눕지 마!”, “(위험하니) 뛰지 마!”, “(친구와) 싸우지 마!” 같은 말 속에 아이들에게 허용되는 건 딱 한 가지다. “재밌게 놀라” 는 것(아무 것도 안 하면서 재밌기란, 참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다). 때로는 아이들 노는 것을 지켜보다가 “왜 쟤랑은 안 놀아. 같이 사이좋게 놀아야지!” 하 면서 아이들 관계에 적극 개입하는 부모도 있다. 소외된 아이 없이 두루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선의의 교육적 접근이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이 또한 맘대로 놀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 요소일 뿐이다.
제 삶을 살아보게 내버려두기
항상 어른이 곁에서 버티고 있어야 할 것처럼 연약해 보이는 존재지만, 아이들은 생각보다 용감하고 생각보다 스스로를 지켜내는 힘이 강하다. 오히려 어른이 없을수록 아이는 자기 삶에 책임감을 느끼며, 위험 상황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줄 안다. 내가 여행길에서 만난 아이들, 동생을 데리고 강가에 나와 제 손으로 빨래를 하던 필리핀 소녀나 히말라야 중턱에서 야크 떼를 진두지휘하던 네팔의 여덟 살 소년은 어린 나이에도 ‘제 역할’을 해내는 위풍당당함을 보여주었다. 이 아이들은 스스로 삶을 살아 갈 기회를 얻었고 그 능력을 한껏 발휘하는 것뿐인데, 과잉보호 문화에 익숙한 타국의 어른이 지레 연민의 눈으로 ‘아이고, 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하고 바라볼 뿐이었다. 서른이 넘은 딸의 회사에서 내준 숙제를 아버지가 대신 해주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니 말이다.
살다보면 그리워지는 어린 시절이 있다. 내겐 혼자 돌아오는 하굣길이 그렇다. 버스에 내려서도 삼십 분 넘게 걸어 들어가야 했던, 어린아이에게는 너무 먼 시골길이었다. 버스를 잘못 타서 눈물을 쏟기도 하고, 차비를 잃어버려 두어 시간 걸어오기도 하고, 집에 도착할 시간을 계산해 머릿속으로 한편의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하면서, 험난한 세상에 혼자 서는 법을 배웠다. 어른이 되고 보니,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학교를 오가면서 보냈던 그 혼자만의 시간이 내겐 빛나는 삶의 보물이 되었다.
요즘 세상에 혼자 먼 길을 걸어본 아이가 있을까.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자기의 무게를 등에 지어본 아이가 있을까. 학원 뺑뺑이 도는 것 말고, 어른의 허락을 구해야 하는 정해진 놀이 말고, 어른이 된 이 아이들에게는 어린 시절의 어떤 기억이 남아 있을까.
아이들을 옭아매는 현실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다. 지금은 어른들의 숨 막히는 통제에 발버둥 치며 저항이라도 하지만, 언젠가는 그것에 길들여진 아이들이 ‘놀고 싶은 마음’마저 잃게 되는 것이다. 어른이란 존재가 우뚝 서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요즘,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른이 사라진 그들만의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장희숙 (민들레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