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사훈련의 아웃소싱
지난 7월 공주사대부고 학생들이 해병대 사설캠프에 참가했다가 파도에 휩쓸려 5명이
목숨을 잃었다. 캠프를 진행한 교관과 업체에 대한 자격 논란, 캠프 인솔 교사들의
무책임함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고, 해병대사령부는 미인가 사설 캠프를 막기 위해 ‘해병대
캠프’ 상표등록을 추진하겠다고 공표했다. 이런저런 대책들이 시행된다면 아마도 좀더
안전한 캠프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걸로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정작 우리가 짚어야 할 문제는 교육의 탈을 쓴 채 사회 전반에 횡행하고
있는 ‘군대문화’이다. 꽤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에는 해병대 캠프뿐 아니라 각종 병영체험
캠프가 유행하고 있다. 2012년 한 해 동안 국방부가 시행한 병영체험 훈련에 참가한
청소년만 해도 74만 명에 이른다. 무분별하게 성행하고 있는 사설 업체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학교뿐 아니라 기업체나 공공기관들도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구성원들을 강한 인재로 키워야 한다며 신입사원 연수나 직원 MT
등에 극기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다.
병영문화가 우리 사회에 더 깊숙이 침투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IMF사태’였다고
볼 수 있다. 도산의 위협을 느낀 많은 기업들은 더 한층 ‘하면 된다’ 식의 군대식 정신을
사원들에게 주입시켜 위기 극복을 꾀했고, 생존의 위협을 느낀 개인들은 별 저항 없이
순응했다. 익숙한 문화였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후 이어진 금융위기도 여기에
한몫 하면서 전 사회적으로 병영 신드롬 양상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서 안보교육이 강화되고, 때마침 천안함 사건이 터지면서 각 시·도교육청에서는
일선 학교에 병영체험 캠프 참가를 독려하는 공문을 내려 보내기까지 한 걸로 드러난다.
최근 병영문화를 사회 전반에 퍼트리는 데 더욱 공헌하고 있는 것은 방송 예능
프로그램이다.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MBC의 <진짜 사나이>는 연예인들을 실제 군부대에
입소시켜 부대생활 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리얼 예능 프로그램’이다. 육군본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만들어지고 있다는데, 방송에 군대 용어와 군사 장비 등이 여과
없이 등장한다. 군대시절은 더 고생스러웠던 만큼 남자들에게는 학창시절보다 더 진한
추억거리가 된다. 세월이 흘러 소파에 드러누워서 보는 <진짜 사나이>는 연병장에서
개처럼 구르던 시절을 ‘그리운 군대시절’로 회상하게 만든다.
‘군대에 가야 사람 된다’는 이상한 신화가 퍼져 있는 사회에서 병영문화는 별 거부감 없이
일상 속으로 파고든다. 백 일 동안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곰의 후손들이어서,
3년 동안 짬밥만 먹으면 철부지가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성숙이란 것이
그렇게 해서 가능한 거라면, 일명 ‘가스통’으로 불리는 해병대 예비역들이 각종 시위
현장에서 보여주는 미숙함의 극치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번에 사고가 난 공주사대부고의 해병대 캠프는 ‘창의적 체험활동’의 일안으로 기획된
필수 교육과정의 하나였다고 한다. 명령에 복종하는 병영 체험이 창의성 함양에 도움이
된다는 교육 논리는 참으로 의아스럽다. 그동안 학교가 자체적으로 주입해오던 군대문화를
아웃소싱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일부 학교에서는 ‘정신
차리고 새 사람이 되라’는 명목으로 징계 받은 학생들을 병영체험 캠프에 의무적으로
참가시키기도 한다. 이른바 문제아들은 ‘정신을 개조’하기 위해, 일반학생들은 ‘더 강한
정신력’을 키우기 위해 이러한 캠프를 학교 공식 일정으로 운영하고 있다.
가정교육이 부재한 상황에서 학교도 교육적 기능을 못하게 되면서 손쉬운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병영체험 캠프가 아닐까. 아이들을 버릇없고 나약하게 길러놓고서 뒤늦게
군대식으로라도 훈련시키면 나아질까 하는 거라면 판단착오다. 예의나 인내심은 ‘얼차려’로
길러질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 아닌가.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고 참는(忍) 것이 예(禮)이고, 이는 곧 인(仁)으로 통한다. 이런
덕목은 일상의 삶 속에서 길러지는 것이지 캠프에서 며칠 생고생을 한다고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병영 캠프의 실상은 극기복례(復禮)가 아닌 무례(無禮)를 가르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삶을 거세당한 채 자라는 아이들이 몇 박 며칠 뻘밭에서 뒹굴며 생고생을 한다고 강인한
정신력이 길러질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인간과 삶에 대해 너무 무지한 것이다. 해병대 캠프를
다녀온 한 고등학생 말에 의하면, ‘윗사람 말 안 들으면 불이익이 돌아온다는 사실이
육체적으로 새겨진 경험’이었다고 한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제일 편해요. 발길질
당하거나 여학생들 앞에서 망신당하며 욕먹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견디기 힘든 과정을 견뎌내는 경험을 하는 것이 극기 체험이라고 흔히들 여기지만, 진정한
극기는 성찰력에서 생겨난다. 생도들로 하여금 아무런 생각 없이 조건반사식으로 명령에
복종하도록 훈련시키는 제식훈련의 목적은 성찰력을 거세하는 것이다. 열중쉬엇, 차렷,
앞으로 갓, 뒤로돌아 갓, 좌향 앞으로 갓, 우향 앞으로 갓… 기계적인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머릿속이 텅 비면서 로봇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원산폭격 같은 ‘얼차려’가 얼을
빼놓듯, 해병대식 유격훈련은 사고를 마비시키고 동물적 생존 본능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군대에 갔다 와야 사람 된다?
시키는 대로 뒹구는 훈련을 하는 것이 병영 체험이라는 걸 군대를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군에 갔다 와야 사람 된다’에서 ‘사람’의 정의는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이다. 또 ‘자기보다 아랫사람에게는 군림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집단 속에서 부대끼다보면 눈치도 늘고 철이 드는 것도 있겠지만,
위계질서에 철저한 군댓밥, 곧 ‘짬밥’을 먹어본 사람이 터득하는 세상살이 이치는 ‘까라면
까는 것’이다. 이 짬밥의 처세술을 익힌 사람은 사회생활도 눈치껏 잘할 수 있게 된다.
회사도 군대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 초 ‘글로벌 초일류’를 표방하는 한 대기업에서는 신입사원 수련대회 때 8천 명의
신입사원들이 임원단 앞에 사열해 ‘초일류’란 글자를 만드는 카드섹션을 벌였다고 한다.
대회에 앞서 사흘 동안 하루 9시간씩 열과오를 맞추는 연습을 해야 했다. 세계적 기업임을
자랑하는 회사의 신입사원 수련대회 풍경이라 하기엔 황당한 퍼포먼스가 아닐 수 없다.
군대문화에 찌든 임원단이 하루빨리 옷을 벗지 않는 한 그 기업의 미래는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군대문화의 요체는 정신을 길들이기 위해 먼저 몸을 길들이는 것이다. 근대 학교문화도
마찬가지다. 군대와 마찬가지로 부국강병을 위한 제도의 하나로 생겨난 근대 학교인 만큼
당연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차렷, 열중쉬엇 같은 제식훈련의 기본 동작들이 학교에서
그대로 쓰인 것은 병사들의 훈련 목적과 학생들의 교육 목적이 근본적으로 같기 때문이다.
학교는 거기에 한 술 더 떠 ‘앞으로 나란히’라는 것을 고안해냈다. 앞줄을 맞추는 데 서툰
어린 학생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누군가가 창안해낸 동작일 것이다.
앞으로 나란히! 이 동작은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몸 둘 바를 스스로 정하지 못하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정해진 자리에 서도록 만든다. 집단 속에서 개체로 하여금 자기 몸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훈련이다. 발이 근질거려도 꼼짝하지 못하고, 앞사람의 앞사람이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게 만드는 ‘앞으로 나란히’는 학교가 아이들에게 가르친 가장 중요한
교육과정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숨겨진 교육과정(hidden curriculum)이다. 집단 속에서
자신의 몸둘 바를 터득하는 훈련장이라는 점에서 군대와 학교는 공통점이 많다.
80년대만 해도 고등학생들은 매주 하루씩은 군복 같은 교련복을 입고 등교를 했었다. 교련
시간에는 제식훈련과 총검술 같은 기본 동작들을 익혔다. 해마다 운동회를 대신해 열병식도
해야 했다. 민주화 과정에서 학교의 병영화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면서 고등학교에서 교련
과목이 사라진 것은 1997년이다. 교련 과목은 사라졌어도 학교에 배인 군대문화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선배와 후배, 교장과 교사의 위계는 여전히 군대의 위계와 닮았다.
그렇게 병영 같은 학교를 나와 진짜 병영에서 짬밥을 먹다가 다시 병영 같은 회사에 들어가
평생 동안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 보통 남성들의 슬픈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코흘리개들이 학교에 입학하던 첫날부터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앞으로 나란히’와 ‘차렷’
‘열중쉬엇’ 덕분에 국가주도의 근대화 과업은 일사불란하게 추진될 수 있었다. 그 관성이
아직도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는 듯하지만, 20세기 군대문화 방식으로 21세기를 헤쳐가려
한다면 ‘글로벌 초일류’ 구호는 구호에 그치게 될 것이다.
진정한 극기는 공동체성의 회복이 아닐까
하지만 글로벌 초일류 국가가 못 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글로벌하게 사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노심초사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의 한국식
삶이 좋은 것도 결코 아니므로 우리는 제3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인간적인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 대안운동의 근본 방향 아닌가. 아이들을 길들이는 훈련이 아닌 인간적인
훈육의 길을 찾고, 집단주의가 아닌 공동체성을 기르는 교육, 교육다운 교육을 구현해
보이는 것이 대안교육의 역할일 것이다.
집단문화가 아닌 공동체문화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물론 병영문화 그 자체가 악은
아니다. 인간사회에서 병영은 그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고, 거기에 맞는 문화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다만 그것이 병영을 넘어 사회 전반에 침투할 때 생겨나는 부작용이 우려스러울
따름이다. 집단이 아닌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혼생활이 힘든 것처럼,
함께 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그만큼 우리를 성장시키는 일이고 그래서 해볼
만한 일일 것이다. 대안학교가 비교적 잘 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이 부분이 아닐까,
가정에서 제대로 훈육이 안 된 아이들을 데리고서 진땀을 빼고 있긴 하지만 그 나름
노하우를 축적해왔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예전에는 그래도 뭘 시키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던 반면 요즘 아이들은 몸이 굼떠서 시키는
일도 마지못해 하거나 잘 하지 않는다. 공부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도록 훈련 받은
중산층 아이들도, 방치되다시피 자란 저소득층 아이들도 양상이 좀 다를 뿐 스스로 몸둘
바를 모르기는 매일반이다. 이런 아이들을 데리고 몸공부 마음공부를 제대로 해보자는 것이
대안교육인 셈이다. 몸을 길들이는 훈련, 정신을 길들이는 훈련이 아니라 자기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자각하고 스스로 규율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교육의
역할이다.
대안학교들이 즐겨(?) 하는 ‘지리산 종주’나 ‘도보 순례’ 같은 것들 또한 일종의 극기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아이들이 불평할 만큼 인기 없는 교육과정이지만, 지리산
종주나 도보 순례가 해병대 캠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과의 대면 시간을 만들어준다는
점일 것이다. 조교의 호령 같은 것도 없이 묵묵히 걷고 또 걸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만들어내는 교육적 효과가 있다. 하지만 그 방식에서는 좀더 진화할 필요가 있다. 수십
명이 무리지어 산을 타거나 행군하듯이 줄지어 걷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적은 수가
모둠별로 움직이는 것이 ‘걸으면서 내면을 성찰하기’의 본래목적에 더 맞을 것이다.
안전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적절히 모둠을 구성해서,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또 단체
생활을 하는 가운데 자기를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하지만 몇박 며칠 진행되는 캠프 방식의 프로그램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생활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배어야 하는 것을 단기 속성으로 기를 수는 없는 일이다. 학기 내내
교실 안에서 살다시피 하는 일반 학교 학생들의 경우 캠프가 숨통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경우에는 더욱이나 그저 몸을 충분히 놀리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각에서는 병영캠프의 대안으로 평화캠프, 민주캠프 등을 제안하기도 하지만, 학기
내내 제대로 놀아보지 못한 아이들이 다만 며칠만이라도 마음껏 몸을 놀려 놀 수 있게 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게 있을까. 거기에다 극기니 평화니 민주니 가치를 덧씌우려 애를
쓰는 것은 꼰대들의 직업병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아니면 캠프 주최측의 상술이든가. 뭔가
좀 있어 보이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장사꾼들의 전형적인 수법이고, 교육 사업도 예외는
아니다. 대안교육 또한 이러한 분칠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민주시민을 기르는 것이 이 시대 공교육이 해야 하는 역할이라면 병영체험은 거꾸로 가는
길이다. 병영체험 같은 왜곡된 극기훈련이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되는 사회에서
공동체성이나 민주주의가 싹을 제대로 틔우기는 어렵다. 공동체보다 자신들의 패거리가,
민주주의보다 자신들의 기득권이 더 소중한 집단이 있다. 개체화된 개인들은 이들이 부는
호각소리에 따라 선착순 달리기를 하느라 가쁜 숨을 몰아쉰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아이들의 몸을 길들이고 정신을 길들이려는 시도에 아이들 스스로
저항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아이들의 신체와 생명의 안전도 지켜야 하지만 정신과
영혼의 건강을 지킬 책임도 있다. 다섯 아이들을 파도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데 머물러서는 그 꽃다운 청춘들에게 면목이 없다. 병영 같은 사회에서 뺑뺑이를 돌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지를 생각해볼 일이다.
그것은 곧 부모나 교사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이자, 거꾸로 돌아가는 민주주의
시계를 되돌리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현병호 발행인
(이 글은 2013년 8월에 발행된 격월간 <<민들레_88호>> 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군사훈련의 아웃소싱
지난 7월 공주사대부고 학생들이 해병대 사설캠프에 참가했다가 파도에 휩쓸려 5명이
목숨을 잃었다. 캠프를 진행한 교관과 업체에 대한 자격 논란, 캠프 인솔 교사들의
무책임함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고, 해병대사령부는 미인가 사설 캠프를 막기 위해 ‘해병대
캠프’ 상표등록을 추진하겠다고 공표했다. 이런저런 대책들이 시행된다면 아마도 좀더
안전한 캠프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걸로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정작 우리가 짚어야 할 문제는 교육의 탈을 쓴 채 사회 전반에 횡행하고
있는 ‘군대문화’이다. 꽤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에는 해병대 캠프뿐 아니라 각종 병영체험
캠프가 유행하고 있다. 2012년 한 해 동안 국방부가 시행한 병영체험 훈련에 참가한
청소년만 해도 74만 명에 이른다. 무분별하게 성행하고 있는 사설 업체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학교뿐 아니라 기업체나 공공기관들도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구성원들을 강한 인재로 키워야 한다며 신입사원 연수나 직원 MT
등에 극기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다.
병영문화가 우리 사회에 더 깊숙이 침투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IMF사태’였다고
볼 수 있다. 도산의 위협을 느낀 많은 기업들은 더 한층 ‘하면 된다’ 식의 군대식 정신을
사원들에게 주입시켜 위기 극복을 꾀했고, 생존의 위협을 느낀 개인들은 별 저항 없이
순응했다. 익숙한 문화였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후 이어진 금융위기도 여기에
한몫 하면서 전 사회적으로 병영 신드롬 양상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서 안보교육이 강화되고, 때마침 천안함 사건이 터지면서 각 시·도교육청에서는
일선 학교에 병영체험 캠프 참가를 독려하는 공문을 내려 보내기까지 한 걸로 드러난다.
최근 병영문화를 사회 전반에 퍼트리는 데 더욱 공헌하고 있는 것은 방송 예능
프로그램이다.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MBC의 <진짜 사나이>는 연예인들을 실제 군부대에
입소시켜 부대생활 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리얼 예능 프로그램’이다. 육군본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만들어지고 있다는데, 방송에 군대 용어와 군사 장비 등이 여과
없이 등장한다. 군대시절은 더 고생스러웠던 만큼 남자들에게는 학창시절보다 더 진한
추억거리가 된다. 세월이 흘러 소파에 드러누워서 보는 <진짜 사나이>는 연병장에서
개처럼 구르던 시절을 ‘그리운 군대시절’로 회상하게 만든다.
‘군대에 가야 사람 된다’는 이상한 신화가 퍼져 있는 사회에서 병영문화는 별 거부감 없이
일상 속으로 파고든다. 백 일 동안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곰의 후손들이어서,
3년 동안 짬밥만 먹으면 철부지가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성숙이란 것이
그렇게 해서 가능한 거라면, 일명 ‘가스통’으로 불리는 해병대 예비역들이 각종 시위
현장에서 보여주는 미숙함의 극치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번에 사고가 난 공주사대부고의 해병대 캠프는 ‘창의적 체험활동’의 일안으로 기획된
필수 교육과정의 하나였다고 한다. 명령에 복종하는 병영 체험이 창의성 함양에 도움이
된다는 교육 논리는 참으로 의아스럽다. 그동안 학교가 자체적으로 주입해오던 군대문화를
아웃소싱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일부 학교에서는 ‘정신
차리고 새 사람이 되라’는 명목으로 징계 받은 학생들을 병영체험 캠프에 의무적으로
참가시키기도 한다. 이른바 문제아들은 ‘정신을 개조’하기 위해, 일반학생들은 ‘더 강한
정신력’을 키우기 위해 이러한 캠프를 학교 공식 일정으로 운영하고 있다.
가정교육이 부재한 상황에서 학교도 교육적 기능을 못하게 되면서 손쉬운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병영체험 캠프가 아닐까. 아이들을 버릇없고 나약하게 길러놓고서 뒤늦게
군대식으로라도 훈련시키면 나아질까 하는 거라면 판단착오다. 예의나 인내심은 ‘얼차려’로
길러질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 아닌가.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고 참는(忍) 것이 예(禮)이고, 이는 곧 인(仁)으로 통한다. 이런
덕목은 일상의 삶 속에서 길러지는 것이지 캠프에서 며칠 생고생을 한다고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병영 캠프의 실상은 극기복례(復禮)가 아닌 무례(無禮)를 가르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삶을 거세당한 채 자라는 아이들이 몇 박 며칠 뻘밭에서 뒹굴며 생고생을 한다고 강인한
정신력이 길러질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인간과 삶에 대해 너무 무지한 것이다. 해병대 캠프를
다녀온 한 고등학생 말에 의하면, ‘윗사람 말 안 들으면 불이익이 돌아온다는 사실이
육체적으로 새겨진 경험’이었다고 한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제일 편해요. 발길질
당하거나 여학생들 앞에서 망신당하며 욕먹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견디기 힘든 과정을 견뎌내는 경험을 하는 것이 극기 체험이라고 흔히들 여기지만, 진정한
극기는 성찰력에서 생겨난다. 생도들로 하여금 아무런 생각 없이 조건반사식으로 명령에
복종하도록 훈련시키는 제식훈련의 목적은 성찰력을 거세하는 것이다. 열중쉬엇, 차렷,
앞으로 갓, 뒤로돌아 갓, 좌향 앞으로 갓, 우향 앞으로 갓… 기계적인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머릿속이 텅 비면서 로봇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원산폭격 같은 ‘얼차려’가 얼을
빼놓듯, 해병대식 유격훈련은 사고를 마비시키고 동물적 생존 본능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군대에 갔다 와야 사람 된다?
시키는 대로 뒹구는 훈련을 하는 것이 병영 체험이라는 걸 군대를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군에 갔다 와야 사람 된다’에서 ‘사람’의 정의는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이다. 또 ‘자기보다 아랫사람에게는 군림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집단 속에서 부대끼다보면 눈치도 늘고 철이 드는 것도 있겠지만,
위계질서에 철저한 군댓밥, 곧 ‘짬밥’을 먹어본 사람이 터득하는 세상살이 이치는 ‘까라면
까는 것’이다. 이 짬밥의 처세술을 익힌 사람은 사회생활도 눈치껏 잘할 수 있게 된다.
회사도 군대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 초 ‘글로벌 초일류’를 표방하는 한 대기업에서는 신입사원 수련대회 때 8천 명의
신입사원들이 임원단 앞에 사열해 ‘초일류’란 글자를 만드는 카드섹션을 벌였다고 한다.
대회에 앞서 사흘 동안 하루 9시간씩 열과오를 맞추는 연습을 해야 했다. 세계적 기업임을
자랑하는 회사의 신입사원 수련대회 풍경이라 하기엔 황당한 퍼포먼스가 아닐 수 없다.
군대문화에 찌든 임원단이 하루빨리 옷을 벗지 않는 한 그 기업의 미래는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군대문화의 요체는 정신을 길들이기 위해 먼저 몸을 길들이는 것이다. 근대 학교문화도
마찬가지다. 군대와 마찬가지로 부국강병을 위한 제도의 하나로 생겨난 근대 학교인 만큼
당연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차렷, 열중쉬엇 같은 제식훈련의 기본 동작들이 학교에서
그대로 쓰인 것은 병사들의 훈련 목적과 학생들의 교육 목적이 근본적으로 같기 때문이다.
학교는 거기에 한 술 더 떠 ‘앞으로 나란히’라는 것을 고안해냈다. 앞줄을 맞추는 데 서툰
어린 학생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누군가가 창안해낸 동작일 것이다.
앞으로 나란히! 이 동작은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몸 둘 바를 스스로 정하지 못하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정해진 자리에 서도록 만든다. 집단 속에서 개체로 하여금 자기 몸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훈련이다. 발이 근질거려도 꼼짝하지 못하고, 앞사람의 앞사람이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게 만드는 ‘앞으로 나란히’는 학교가 아이들에게 가르친 가장 중요한
교육과정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숨겨진 교육과정(hidden curriculum)이다. 집단 속에서
자신의 몸둘 바를 터득하는 훈련장이라는 점에서 군대와 학교는 공통점이 많다.
80년대만 해도 고등학생들은 매주 하루씩은 군복 같은 교련복을 입고 등교를 했었다. 교련
시간에는 제식훈련과 총검술 같은 기본 동작들을 익혔다. 해마다 운동회를 대신해 열병식도
해야 했다. 민주화 과정에서 학교의 병영화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면서 고등학교에서 교련
과목이 사라진 것은 1997년이다. 교련 과목은 사라졌어도 학교에 배인 군대문화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선배와 후배, 교장과 교사의 위계는 여전히 군대의 위계와 닮았다.
그렇게 병영 같은 학교를 나와 진짜 병영에서 짬밥을 먹다가 다시 병영 같은 회사에 들어가
평생 동안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 보통 남성들의 슬픈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코흘리개들이 학교에 입학하던 첫날부터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앞으로 나란히’와 ‘차렷’
‘열중쉬엇’ 덕분에 국가주도의 근대화 과업은 일사불란하게 추진될 수 있었다. 그 관성이
아직도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는 듯하지만, 20세기 군대문화 방식으로 21세기를 헤쳐가려
한다면 ‘글로벌 초일류’ 구호는 구호에 그치게 될 것이다.
진정한 극기는 공동체성의 회복이 아닐까
하지만 글로벌 초일류 국가가 못 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글로벌하게 사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노심초사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의 한국식
삶이 좋은 것도 결코 아니므로 우리는 제3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인간적인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 대안운동의 근본 방향 아닌가. 아이들을 길들이는 훈련이 아닌 인간적인
훈육의 길을 찾고, 집단주의가 아닌 공동체성을 기르는 교육, 교육다운 교육을 구현해
보이는 것이 대안교육의 역할일 것이다.
집단문화가 아닌 공동체문화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물론 병영문화 그 자체가 악은
아니다. 인간사회에서 병영은 그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고, 거기에 맞는 문화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다만 그것이 병영을 넘어 사회 전반에 침투할 때 생겨나는 부작용이 우려스러울
따름이다. 집단이 아닌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혼생활이 힘든 것처럼,
함께 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그만큼 우리를 성장시키는 일이고 그래서 해볼
만한 일일 것이다. 대안학교가 비교적 잘 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이 부분이 아닐까,
가정에서 제대로 훈육이 안 된 아이들을 데리고서 진땀을 빼고 있긴 하지만 그 나름
노하우를 축적해왔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예전에는 그래도 뭘 시키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던 반면 요즘 아이들은 몸이 굼떠서 시키는
일도 마지못해 하거나 잘 하지 않는다. 공부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도록 훈련 받은
중산층 아이들도, 방치되다시피 자란 저소득층 아이들도 양상이 좀 다를 뿐 스스로 몸둘
바를 모르기는 매일반이다. 이런 아이들을 데리고 몸공부 마음공부를 제대로 해보자는 것이
대안교육인 셈이다. 몸을 길들이는 훈련, 정신을 길들이는 훈련이 아니라 자기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자각하고 스스로 규율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교육의
역할이다.
대안학교들이 즐겨(?) 하는 ‘지리산 종주’나 ‘도보 순례’ 같은 것들 또한 일종의 극기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아이들이 불평할 만큼 인기 없는 교육과정이지만, 지리산
종주나 도보 순례가 해병대 캠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과의 대면 시간을 만들어준다는
점일 것이다. 조교의 호령 같은 것도 없이 묵묵히 걷고 또 걸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만들어내는 교육적 효과가 있다. 하지만 그 방식에서는 좀더 진화할 필요가 있다. 수십
명이 무리지어 산을 타거나 행군하듯이 줄지어 걷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적은 수가
모둠별로 움직이는 것이 ‘걸으면서 내면을 성찰하기’의 본래목적에 더 맞을 것이다.
안전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적절히 모둠을 구성해서,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또 단체
생활을 하는 가운데 자기를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하지만 몇박 며칠 진행되는 캠프 방식의 프로그램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생활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배어야 하는 것을 단기 속성으로 기를 수는 없는 일이다. 학기 내내
교실 안에서 살다시피 하는 일반 학교 학생들의 경우 캠프가 숨통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경우에는 더욱이나 그저 몸을 충분히 놀리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각에서는 병영캠프의 대안으로 평화캠프, 민주캠프 등을 제안하기도 하지만, 학기
내내 제대로 놀아보지 못한 아이들이 다만 며칠만이라도 마음껏 몸을 놀려 놀 수 있게 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게 있을까. 거기에다 극기니 평화니 민주니 가치를 덧씌우려 애를
쓰는 것은 꼰대들의 직업병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아니면 캠프 주최측의 상술이든가. 뭔가
좀 있어 보이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장사꾼들의 전형적인 수법이고, 교육 사업도 예외는
아니다. 대안교육 또한 이러한 분칠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민주시민을 기르는 것이 이 시대 공교육이 해야 하는 역할이라면 병영체험은 거꾸로 가는
길이다. 병영체험 같은 왜곡된 극기훈련이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되는 사회에서
공동체성이나 민주주의가 싹을 제대로 틔우기는 어렵다. 공동체보다 자신들의 패거리가,
민주주의보다 자신들의 기득권이 더 소중한 집단이 있다. 개체화된 개인들은 이들이 부는
호각소리에 따라 선착순 달리기를 하느라 가쁜 숨을 몰아쉰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아이들의 몸을 길들이고 정신을 길들이려는 시도에 아이들 스스로
저항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아이들의 신체와 생명의 안전도 지켜야 하지만 정신과
영혼의 건강을 지킬 책임도 있다. 다섯 아이들을 파도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데 머물러서는 그 꽃다운 청춘들에게 면목이 없다. 병영 같은 사회에서 뺑뺑이를 돌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지를 생각해볼 일이다.
그것은 곧 부모나 교사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이자, 거꾸로 돌아가는 민주주의
시계를 되돌리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현병호 발행인
(이 글은 2013년 8월에 발행된 격월간 <<민들레_88호>> 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