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 진학을 결정하면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영 내키지 않았다.
이유는 내가 진학에 대해서 고민할 때 제대로 된 절차를 밟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상적인 방법이라면 대학을 갈지 말지, 가야 한다면 왜 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을 한 후에
나에게 맞는 대학을 선택하고 진학해야 하는데, 대학을 간다는 전제를 깔아둔 채 전공분야를 먼저 골랐던 것이다.
대학을 왜 가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없었던 건 어쩌면
내 의식의 깊은 곳에는 ‘고졸’이라는 꼬리표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과
세상의 손찌검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찝찝함에 대한 본질을 알고 나니 모든 학생들이 대학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일차적인 질문을 던질 수 없게끔 만들어져 있는 사회가 너무 싫었다.
그래도 나는 나름 스스로를 제도와 관습, 권력이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고 깨어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정작 그 모든 것들에 얽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힘의 논리에 족쇄가 묶인 채 헤어 나오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평소에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몇몇 친구들은
내가 수능 날에 1인 시위를 할 계획을 밝히자 재밌겠다면서 같이 시위를 준비하기로 했다.
수능까지 보름 정도를 남기고 이 모임이 결성되었다.
지금의 교육과 입시제도가 어떤 문제점들이 있는지 각자의 생각들을 나누고
피켓엔 어떤 내용들을 담을지 정하고 어떤 퍼포먼스를 할지 구체적인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지금의 제도를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와서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민운동본부’에서 주장하는 ‘대학평준화’에 대해 같이 공부를 했다.
1인 시위를 할 때 혹은 어떤 것에 대해서 반대하고 운동을 할 때에도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기자들하고 인터뷰를 하면서 대학을 가지 않는다면 졸업 후의 진로는 어떻게 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뭐, 기자들뿐만 아니라 고3이 되면서 어딜 가나 어느 대학 갈 거냐는 질문을 받고,
대학에 가지 않을 거라고 하면 바로 다음 코스로 받는 질문이 그거다.
이 질문이 가끔은 씁쓸하다.
왜냐면 이 질문은 종종 ‘대학도 가지 않을 거면 뭘 하고 살 건데?’라는 비아냥에서 비롯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학력과 학벌주의 사회의 한계에서 사고가 멈추어버린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라고 가르치려 들지만
글쎄, 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최근에 담임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부르셨다.
그리곤 뜬금없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으셨다.
졸업 후의 행로가 불분명한 자신의 학생이 꽤나 걱정되셨나 보다.
“뭐 대학 졸업한 학생들이 다들 그렇듯이 자취하고 알바 하면서 살겠죠. 졸업 후에 바로 소속될 단체 같은 건 없어요.”
“그럼 구체적인 계획은 없는 거네?”
“그렇죠, 뭐. 졸업하자마자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마도 힘들 테니까 일단 독립하고 입에 풀칠하며 천천히 준비하겠죠.
다만 걱정되는 건 내가 원하는 배움을 유지할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있을지 걱정이에요.”
세상이 내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말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일단 지금은 사회에서 티격태격 모든 악한 것들과 부딪히며 살고 싶다.
안전하고 넓은 길은 재미없으니까.
뭘 하며 먹고 살지가 아니라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지에 대한 마음만 굳건히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든 내가 바라는 대로 살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자신감만 있다.
학생들은 이렇게 자기최면을 걸곤 한다.
지금의 고통을 잠시만 참으면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고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지.
언제까지나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삶에는 이겨내야 할 시련이 항상 있기 마련이고,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 말이다.
어쩌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엘리트와 기득권을 향한 꿈을 꾸는 것이 무한경쟁 자본주의 사회의 꿈은 아니었을까?
왜냐면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를 원활하게 돌아가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한다.
수없이 많은 갈림길을 만나게 되어 어디로 가야 할지 방황하기도 하고
아니면 눈에 잘 띄는 더 넓은 길을 주저 없이 가기도 한다.
‘선택’이라는 단어의 속성을 생각해보면 거기서 ‘나’라는 주체는 빠질 수가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슬프지만 대개는 둘 중 하나이다.
자신의 삶을 선택 당하거나 혹은 선택 당하려고 발버둥치거나.
과연 우리가 하는 선택들이 주체적인 선택들이었을까?
만약 아니라면 누가(혹은 무엇이) 우리의 길을 선택하려 드는 걸까.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책상 앞에 앉아 공부만 한다고 세상이 예뻐진다거나 나의 삶이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민들레 66호, 박두헌 ‘수능시험 날 정부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에서
대학 진학을 결정하면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영 내키지 않았다.
이유는 내가 진학에 대해서 고민할 때 제대로 된 절차를 밟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상적인 방법이라면 대학을 갈지 말지, 가야 한다면 왜 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을 한 후에
나에게 맞는 대학을 선택하고 진학해야 하는데, 대학을 간다는 전제를 깔아둔 채 전공분야를 먼저 골랐던 것이다.
대학을 왜 가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없었던 건 어쩌면
내 의식의 깊은 곳에는 ‘고졸’이라는 꼬리표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과
세상의 손찌검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찝찝함에 대한 본질을 알고 나니 모든 학생들이 대학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일차적인 질문을 던질 수 없게끔 만들어져 있는 사회가 너무 싫었다.
그래도 나는 나름 스스로를 제도와 관습, 권력이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고 깨어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정작 그 모든 것들에 얽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힘의 논리에 족쇄가 묶인 채 헤어 나오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평소에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몇몇 친구들은
내가 수능 날에 1인 시위를 할 계획을 밝히자 재밌겠다면서 같이 시위를 준비하기로 했다.
수능까지 보름 정도를 남기고 이 모임이 결성되었다.
지금의 교육과 입시제도가 어떤 문제점들이 있는지 각자의 생각들을 나누고
피켓엔 어떤 내용들을 담을지 정하고 어떤 퍼포먼스를 할지 구체적인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지금의 제도를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와서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민운동본부’에서 주장하는 ‘대학평준화’에 대해 같이 공부를 했다.
1인 시위를 할 때 혹은 어떤 것에 대해서 반대하고 운동을 할 때에도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기자들하고 인터뷰를 하면서 대학을 가지 않는다면 졸업 후의 진로는 어떻게 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뭐, 기자들뿐만 아니라 고3이 되면서 어딜 가나 어느 대학 갈 거냐는 질문을 받고,
대학에 가지 않을 거라고 하면 바로 다음 코스로 받는 질문이 그거다.
이 질문이 가끔은 씁쓸하다.
왜냐면 이 질문은 종종 ‘대학도 가지 않을 거면 뭘 하고 살 건데?’라는 비아냥에서 비롯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학력과 학벌주의 사회의 한계에서 사고가 멈추어버린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라고 가르치려 들지만
글쎄, 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최근에 담임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부르셨다.
그리곤 뜬금없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으셨다.
졸업 후의 행로가 불분명한 자신의 학생이 꽤나 걱정되셨나 보다.
“뭐 대학 졸업한 학생들이 다들 그렇듯이 자취하고 알바 하면서 살겠죠. 졸업 후에 바로 소속될 단체 같은 건 없어요.”
“그럼 구체적인 계획은 없는 거네?”
“그렇죠, 뭐. 졸업하자마자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마도 힘들 테니까 일단 독립하고 입에 풀칠하며 천천히 준비하겠죠.
다만 걱정되는 건 내가 원하는 배움을 유지할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있을지 걱정이에요.”
세상이 내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말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일단 지금은 사회에서 티격태격 모든 악한 것들과 부딪히며 살고 싶다.
안전하고 넓은 길은 재미없으니까.
뭘 하며 먹고 살지가 아니라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지에 대한 마음만 굳건히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든 내가 바라는 대로 살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자신감만 있다.
학생들은 이렇게 자기최면을 걸곤 한다.
지금의 고통을 잠시만 참으면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고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지.
언제까지나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삶에는 이겨내야 할 시련이 항상 있기 마련이고,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 말이다.
어쩌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엘리트와 기득권을 향한 꿈을 꾸는 것이 무한경쟁 자본주의 사회의 꿈은 아니었을까?
왜냐면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를 원활하게 돌아가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한다.
수없이 많은 갈림길을 만나게 되어 어디로 가야 할지 방황하기도 하고
아니면 눈에 잘 띄는 더 넓은 길을 주저 없이 가기도 한다.
‘선택’이라는 단어의 속성을 생각해보면 거기서 ‘나’라는 주체는 빠질 수가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슬프지만 대개는 둘 중 하나이다.
자신의 삶을 선택 당하거나 혹은 선택 당하려고 발버둥치거나.
과연 우리가 하는 선택들이 주체적인 선택들이었을까?
만약 아니라면 누가(혹은 무엇이) 우리의 길을 선택하려 드는 걸까.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책상 앞에 앉아 공부만 한다고 세상이 예뻐진다거나 나의 삶이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민들레 66호, 박두헌 ‘수능시험 날 정부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