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학의 생명, 비실용성
중국과 한국, 일본 아이들이 서구 아이들보다 계산을 잘하는 이유가 수를 세는 언어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한자문화권 언어는 숫자를 10단위마다 끊어 읽고, 수를 표기하는 낱말도 인도유럽어에 비해 적다. 11, 12를 한국어는 ‘십일’ ‘십이’, 중국어는 ‘스이’ ‘스얼’, 일본어는 ‘쥬이치’ ‘쥬니’로 읽는데, 영어는 ‘일레븐’ ‘트웰브’처럼 완전히 새로운 단어를 쓴다. 억 단위까지 숫자를 세는 데 우리말은 14개 단어면 충분한데 영어는 24개 단어가 필요하다. 10단위마다 끊어 읽으면 10진법 연산을 이해하기도 수월하다.
한자문화권 사람들이 계산을 잘하고 암산에도 능한 것은 이런 언어적 특성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반면 서구인들보다 수학을 못하는 이유는 난해한 수학 용어 때문일지도 모른다. 많은 아이들이 초등 4학년 때 분수에 걸려 수학에서 멀어진다. 분수, 약수, 공약수, 공배수 같은 용어의 개념만 이해할 수 있어도 수학과 멀어지는 아이들이 줄어들지 않을까.1) 수를 세는 언어는 모어인데 반해 수학적 개념어들은 대부분 번역어이다 보니 접근이 쉽지 않다.
수포자들 중에는 무리수, 소수, 소인수, 방정식, 근, 제곱근, 로그, 함수, 미적분 같은 난해한 수학 용어에 걸려 넘어져 수학을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무리수(無理數)의 뜻을 정확히 아는 고등학생이 얼마나 될까. 무리수의 영어 이름 irrational number에서 ‘irrational’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뜻으로 미국의 중학생이면 흔히 쓰는 말이다. 반면 한국 학생들의 경우 ‘무리수’라는 생소한 용어부터 접하게 되어 출발선에서부터 넘기 힘든 허들을 만나는 셈이다. 그나마 한자라도 알면 무리(無理)의 의미를 추측할 수 있지만, 대개는 이해하기에 무리인 수로 받아들일 것이다.
산술은 국가가 세금을 징수하고 대규모 공사를 하는 데도 필요한 기술이다. 대륙의 중원이 뻥 뚫린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중앙집권 왕조 국가가 등장해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면서 산술이 발달했다. 삼국시대부터 중앙집권 국가를 이룬 한반도도 사정은 비슷했다. 산술은 학문이 아니라 실용적인 기술이다. 개수를 헤아리고, 치수와 무게를 재는 데 요긴하다. 조선에서 사대부들은 성리학이라는 형이상학에 몰두한 반면 실용적인 분야는 중인계급이 전담하다시피 했다.2) 하지만 성리학이 수학이나 과학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대수학이 수를 세는 기술에서 나왔고, 기하학이 땅의 넓이를 측량하는 기술에서 출발했으니 수학의 출발은 실용성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일찍이 실용성을 넘어 수와 도형의 세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패턴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원리를 탐구하는 수학과 과학의 기초 없이는 기술 발달에도 한계가 있다. 원주율을 모르면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수 없고, 지구와 화성의 공전 속도를 모르면 화성 탐사선을 보낼 수 없다.
문제풀이식 수학교육이 아니라 연역적 사고력을 기르는 수학교육이 필요하다. 같은 한자문화권인 일본에서 세계적인 수학자들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찍이 17세기부터 유럽과 교류하며 ‘난학’3)이 융성하면서 유클리드의 『원론』을 번역 출간하는 등 서구의 연역적 학문을 받아들인 덕분일 것이다. 수학이 패턴의 예술이라 불리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문제풀이에 능숙하다 해도 수학을 아는 것이 아니다. 수학의 정리와 공리는 패턴을 언어화한 것이다.
수학은 실용적인 학문이라기보다 패턴으로 이루어진 세상의 신비를 엿보는 놀이 같은 것이다. 과학과 기술에 도움이 되지만 그것이 수학의 목적은 아니다. 수학은 수학자들에게도 미지의 세계다.(수학자들이 대체로 겸손한 이유가 그래서일까.) 하물며 일반인들에게는 용어도 낯설고 개념도 어렵고 연역적 사고 훈련도 필요하다. 뒤늦게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인이 말했다. 수학 공부는 우리가 모르는 낯선 세계에 겸손한 자세로 귀를 기울이는 일이라고. 어쩌면 이것이 수학 공부의 가장 중요한 가치일지도 모른다.
낯선 세계와 조심스럽게 친해지기. 무리수와 허수를 품고 있는 수의 세계가 끝내 알 수 없는 세계이듯이,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 가까운 이도 사실은 무리수만큼이나 미지의 존재가 아닐까?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앎은 실용적인 지식은 아니지만 우리 삶에 깊이를 더해주는 근원적인 앎일 것이다. 어쩌면 인생 방정식의 근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나의 인생 방정식이 몇 차 방정식인지 미지수가 몇 개인지조차도 모르지만, 삶이 다하기 전에 가능한 더 많은 해를 구할 수 있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자연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
스스로 ‘태생적 문과생’이라 자처하는 유시민은 뒤늦게 자연과학 세계에 입문하면서 ‘신의 언어’에 가까운 수학적 언어가 아닌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수학을 건너뛰고도 자연과학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다행스런 일이다. 나이 들어 수학을 공부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어도 수학을 좋아하게 될 수는 있다. 수학 점수를 잘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수학자가 될 필요도 없으니 수학 공부를 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지 않을까.
공부에는 너무 늦은 법이 없다는 말, 수학에는 통하지 않는다. 두뇌가 원활하게 돌아가던 젊은 시절에도 되지 않았던 수학 공부가 노년에 접어드는 지금 될 리 없다. 그런 나를 세이건 선생과 도킨스 선생이 격려해주었다. ‘수학을 몰라도 돼. 내가 인간의 언어로 말해줄게.’ 나는 그들의 말을 일부 알아들었다. 용기를 북돋워주는 문장도 만났다. “과학은 단순히 사실의 집합이 아니다. 과학은 마음의 상태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며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 실체를 마주하는 방법이다.”(『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p.31)
역사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이 인간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라면 생물학, 화학,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은 물질세계를 이해하는 학문이다. 인문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 그리고 그 안의 분과 학문은 편의상 나눠놓은 것일 뿐 이 세계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생물학을 접한 역사학자는 인류의 역사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얻는다. 유시민의 말처럼 “뇌과학을 알면 생물학에 호기심이 생기고 생명 현상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싶으면 화학을 들여다보게 되고, 원소주기율표를 이해하려다 보면 양자역학과 친해진다.”
생물학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모든 사람의 유전자는 99.9%가 같다. 나머지 0.1% 유전자와 무한대의 후성유전 때문에 80억 명의 서로 다른 사람들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셈이다. 유전자가 100% 같은 일란성 쌍둥이도 환경과 후성유전에 의해 달라진다. 모든 인간의 유전자가 99.9% 같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점보다 같은 점이 훨씬 더 많은 존재임을 말해준다.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고 서로 다름을 드러내려 애쓰고 있지만. 자연과학은 인문학과 다른 시각에서 인간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인문학이 준 이 질문에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생물학을 들여다보고서야 뻔한 답이 있는데도 모르고 살았음을 알았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의미는 없다.’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찾지 못한다. 남한테 찾아 달라고 할 수도 없다. 삶의 의미는 각자 만들어야 한다. ‘내 인생에 나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어떤 의미로 내 삶을 채울까?’ 이것이 과학적으로 옳은 질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런 것을 연구하지 않는다. 질문은 과학적으로 하되 답을 찾으려면 인문학을 소환해야 한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인문학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위의 책 p.127)
물리학과 생물학은 ‘우리 몸을 이루는 물질이 별을 이루는 물질과 같으며, 생명체의 유전자는 동일한 생물학 언어로 씌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거대한 우주는 알고 보면 매우 단순해서 불과 백 몇 가지 원소의 배열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별에서 새로운 원소가 발견될 수도 있겠지만 그다지 많진 않을 것이다. 이 무한한 우주의 삼라만상이 불과 백 몇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니! 과학은 복잡한 세계를 지탱하는 단순한 원리에 눈을 뜰 수 있게 도와준다. 그리고 믿기 힘든 우연의 결합에 의해 기적처럼 이 지구별에 생명체들이 존재하고, 인간이라는 고등생물이 태어났음을 알게 해준다.
지구가 365일 동안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공전 속도는 30km/s다. 또 태양은 태양계가 속한 은하의 수직축을 220km/s라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2억5천만 년 걸려 한 바퀴를 돈다. 지구와 태양의 공전 궤도가 조금 틀어지거나 속도가 조금만 느려져도 인류는 멸종할 테지만, 그런 일은 앞으로 수십억 년 안에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우주 만물은 팽팽하게 서로를 잡아당기며(또는 밀어내며), 너무나 긴밀하게 엮여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는 조상들처럼 신의 자비를 빌지 않고도 이 세상이 지속될 것임을 믿을 수 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기는커녕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되었지만 삶의 무의미함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의미를 묻고 스스로 부여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
1) 약수(約數)의 ‘약’은 묶을 약(約)이다. 어떤 수를 몇 개의 묶음으로 나누는 것이다.(8은 2의 4묶음 또는 4의 2묶음이다. 2와 4가 8의 약수다.) 분수의 ‘분’이 나눌 분(分)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 분수를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2) 조선시대에는 실용 분야를 담당하는 관리를 뽑는 ‘잡과’라는 과거시험이 따로 있었다. 회계나 세무 관리를 뽑는 산과 외에도 역과(통역), 율과(법률), 의과(의료), 음양과(천문지리) 등이 있었다. 주로 향리나 서얼 출신이 응시했다.
3) 蘭學. 네덜란드의 대표 주인 홀랜드(Holland)의 일어식 표기 ‘和蘭’의 학문을 말한다. 일본인들은 17세기부터 네덜란드, 영국 등과 직접 교류하면서 네덜란드어와 영어를 익혀 다양한 학술서들을 직접 번역 출판했다. 지난 80여 년 동안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받은 60명 가운데 일본인이 3명이나 되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일 것이다.
__현병호(발행인)
수학의 생명, 비실용성
중국과 한국, 일본 아이들이 서구 아이들보다 계산을 잘하는 이유가 수를 세는 언어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한자문화권 언어는 숫자를 10단위마다 끊어 읽고, 수를 표기하는 낱말도 인도유럽어에 비해 적다. 11, 12를 한국어는 ‘십일’ ‘십이’, 중국어는 ‘스이’ ‘스얼’, 일본어는 ‘쥬이치’ ‘쥬니’로 읽는데, 영어는 ‘일레븐’ ‘트웰브’처럼 완전히 새로운 단어를 쓴다. 억 단위까지 숫자를 세는 데 우리말은 14개 단어면 충분한데 영어는 24개 단어가 필요하다. 10단위마다 끊어 읽으면 10진법 연산을 이해하기도 수월하다.
한자문화권 사람들이 계산을 잘하고 암산에도 능한 것은 이런 언어적 특성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반면 서구인들보다 수학을 못하는 이유는 난해한 수학 용어 때문일지도 모른다. 많은 아이들이 초등 4학년 때 분수에 걸려 수학에서 멀어진다. 분수, 약수, 공약수, 공배수 같은 용어의 개념만 이해할 수 있어도 수학과 멀어지는 아이들이 줄어들지 않을까.1) 수를 세는 언어는 모어인데 반해 수학적 개념어들은 대부분 번역어이다 보니 접근이 쉽지 않다.
수포자들 중에는 무리수, 소수, 소인수, 방정식, 근, 제곱근, 로그, 함수, 미적분 같은 난해한 수학 용어에 걸려 넘어져 수학을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무리수(無理數)의 뜻을 정확히 아는 고등학생이 얼마나 될까. 무리수의 영어 이름 irrational number에서 ‘irrational’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뜻으로 미국의 중학생이면 흔히 쓰는 말이다. 반면 한국 학생들의 경우 ‘무리수’라는 생소한 용어부터 접하게 되어 출발선에서부터 넘기 힘든 허들을 만나는 셈이다. 그나마 한자라도 알면 무리(無理)의 의미를 추측할 수 있지만, 대개는 이해하기에 무리인 수로 받아들일 것이다.
산술은 국가가 세금을 징수하고 대규모 공사를 하는 데도 필요한 기술이다. 대륙의 중원이 뻥 뚫린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중앙집권 왕조 국가가 등장해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면서 산술이 발달했다. 삼국시대부터 중앙집권 국가를 이룬 한반도도 사정은 비슷했다. 산술은 학문이 아니라 실용적인 기술이다. 개수를 헤아리고, 치수와 무게를 재는 데 요긴하다. 조선에서 사대부들은 성리학이라는 형이상학에 몰두한 반면 실용적인 분야는 중인계급이 전담하다시피 했다.2) 하지만 성리학이 수학이나 과학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대수학이 수를 세는 기술에서 나왔고, 기하학이 땅의 넓이를 측량하는 기술에서 출발했으니 수학의 출발은 실용성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일찍이 실용성을 넘어 수와 도형의 세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패턴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원리를 탐구하는 수학과 과학의 기초 없이는 기술 발달에도 한계가 있다. 원주율을 모르면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수 없고, 지구와 화성의 공전 속도를 모르면 화성 탐사선을 보낼 수 없다.
문제풀이식 수학교육이 아니라 연역적 사고력을 기르는 수학교육이 필요하다. 같은 한자문화권인 일본에서 세계적인 수학자들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찍이 17세기부터 유럽과 교류하며 ‘난학’3)이 융성하면서 유클리드의 『원론』을 번역 출간하는 등 서구의 연역적 학문을 받아들인 덕분일 것이다. 수학이 패턴의 예술이라 불리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문제풀이에 능숙하다 해도 수학을 아는 것이 아니다. 수학의 정리와 공리는 패턴을 언어화한 것이다.
수학은 실용적인 학문이라기보다 패턴으로 이루어진 세상의 신비를 엿보는 놀이 같은 것이다. 과학과 기술에 도움이 되지만 그것이 수학의 목적은 아니다. 수학은 수학자들에게도 미지의 세계다.(수학자들이 대체로 겸손한 이유가 그래서일까.) 하물며 일반인들에게는 용어도 낯설고 개념도 어렵고 연역적 사고 훈련도 필요하다. 뒤늦게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인이 말했다. 수학 공부는 우리가 모르는 낯선 세계에 겸손한 자세로 귀를 기울이는 일이라고. 어쩌면 이것이 수학 공부의 가장 중요한 가치일지도 모른다.
낯선 세계와 조심스럽게 친해지기. 무리수와 허수를 품고 있는 수의 세계가 끝내 알 수 없는 세계이듯이,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 가까운 이도 사실은 무리수만큼이나 미지의 존재가 아닐까?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앎은 실용적인 지식은 아니지만 우리 삶에 깊이를 더해주는 근원적인 앎일 것이다. 어쩌면 인생 방정식의 근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나의 인생 방정식이 몇 차 방정식인지 미지수가 몇 개인지조차도 모르지만, 삶이 다하기 전에 가능한 더 많은 해를 구할 수 있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자연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
스스로 ‘태생적 문과생’이라 자처하는 유시민은 뒤늦게 자연과학 세계에 입문하면서 ‘신의 언어’에 가까운 수학적 언어가 아닌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수학을 건너뛰고도 자연과학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다행스런 일이다. 나이 들어 수학을 공부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어도 수학을 좋아하게 될 수는 있다. 수학 점수를 잘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수학자가 될 필요도 없으니 수학 공부를 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지 않을까.
공부에는 너무 늦은 법이 없다는 말, 수학에는 통하지 않는다. 두뇌가 원활하게 돌아가던 젊은 시절에도 되지 않았던 수학 공부가 노년에 접어드는 지금 될 리 없다. 그런 나를 세이건 선생과 도킨스 선생이 격려해주었다. ‘수학을 몰라도 돼. 내가 인간의 언어로 말해줄게.’ 나는 그들의 말을 일부 알아들었다. 용기를 북돋워주는 문장도 만났다. “과학은 단순히 사실의 집합이 아니다. 과학은 마음의 상태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며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 실체를 마주하는 방법이다.”(『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p.31)
역사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이 인간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라면 생물학, 화학,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은 물질세계를 이해하는 학문이다. 인문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 그리고 그 안의 분과 학문은 편의상 나눠놓은 것일 뿐 이 세계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생물학을 접한 역사학자는 인류의 역사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얻는다. 유시민의 말처럼 “뇌과학을 알면 생물학에 호기심이 생기고 생명 현상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싶으면 화학을 들여다보게 되고, 원소주기율표를 이해하려다 보면 양자역학과 친해진다.”
생물학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모든 사람의 유전자는 99.9%가 같다. 나머지 0.1% 유전자와 무한대의 후성유전 때문에 80억 명의 서로 다른 사람들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셈이다. 유전자가 100% 같은 일란성 쌍둥이도 환경과 후성유전에 의해 달라진다. 모든 인간의 유전자가 99.9% 같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점보다 같은 점이 훨씬 더 많은 존재임을 말해준다.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고 서로 다름을 드러내려 애쓰고 있지만. 자연과학은 인문학과 다른 시각에서 인간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인문학이 준 이 질문에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생물학을 들여다보고서야 뻔한 답이 있는데도 모르고 살았음을 알았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의미는 없다.’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찾지 못한다. 남한테 찾아 달라고 할 수도 없다. 삶의 의미는 각자 만들어야 한다. ‘내 인생에 나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어떤 의미로 내 삶을 채울까?’ 이것이 과학적으로 옳은 질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런 것을 연구하지 않는다. 질문은 과학적으로 하되 답을 찾으려면 인문학을 소환해야 한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인문학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위의 책 p.127)
물리학과 생물학은 ‘우리 몸을 이루는 물질이 별을 이루는 물질과 같으며, 생명체의 유전자는 동일한 생물학 언어로 씌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거대한 우주는 알고 보면 매우 단순해서 불과 백 몇 가지 원소의 배열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별에서 새로운 원소가 발견될 수도 있겠지만 그다지 많진 않을 것이다. 이 무한한 우주의 삼라만상이 불과 백 몇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니! 과학은 복잡한 세계를 지탱하는 단순한 원리에 눈을 뜰 수 있게 도와준다. 그리고 믿기 힘든 우연의 결합에 의해 기적처럼 이 지구별에 생명체들이 존재하고, 인간이라는 고등생물이 태어났음을 알게 해준다.
지구가 365일 동안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공전 속도는 30km/s다. 또 태양은 태양계가 속한 은하의 수직축을 220km/s라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2억5천만 년 걸려 한 바퀴를 돈다. 지구와 태양의 공전 궤도가 조금 틀어지거나 속도가 조금만 느려져도 인류는 멸종할 테지만, 그런 일은 앞으로 수십억 년 안에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우주 만물은 팽팽하게 서로를 잡아당기며(또는 밀어내며), 너무나 긴밀하게 엮여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는 조상들처럼 신의 자비를 빌지 않고도 이 세상이 지속될 것임을 믿을 수 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기는커녕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되었지만 삶의 무의미함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의미를 묻고 스스로 부여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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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약수(約數)의 ‘약’은 묶을 약(約)이다. 어떤 수를 몇 개의 묶음으로 나누는 것이다.(8은 2의 4묶음 또는 4의 2묶음이다. 2와 4가 8의 약수다.) 분수의 ‘분’이 나눌 분(分)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 분수를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2) 조선시대에는 실용 분야를 담당하는 관리를 뽑는 ‘잡과’라는 과거시험이 따로 있었다. 회계나 세무 관리를 뽑는 산과 외에도 역과(통역), 율과(법률), 의과(의료), 음양과(천문지리) 등이 있었다. 주로 향리나 서얼 출신이 응시했다.
3) 蘭學. 네덜란드의 대표 주인 홀랜드(Holland)의 일어식 표기 ‘和蘭’의 학문을 말한다. 일본인들은 17세기부터 네덜란드, 영국 등과 직접 교류하면서 네덜란드어와 영어를 익혀 다양한 학술서들을 직접 번역 출판했다. 지난 80여 년 동안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받은 60명 가운데 일본인이 3명이나 되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일 것이다.
__현병호(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