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전의 명암
어렸을 때 계몽사에서 펴낸 30권짜리 <소년소녀위인전집>을 끼고 살았다. 어려운 살림에 어머님이 큰맘 먹고 사주신 것이었다. 집에는 달리 읽을 책이 없기도 했고 텔레비전도 없어 밖에서 놀지 않을 때면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위인전을 읽고 또 읽는 것이었다. 강감찬, 이성계 같은 인물들보다 원효, 이상재 같은 인물에 더 끌렸던 걸 보면 기질은 타고나는 듯하다.
위인 전집은 양장본에 꽤 두꺼운 책이었는데, 읽기가 시들해지면 서른 권의 책을 블럭처럼 활용해 집을 짓곤 했다. 단칸방을 벗어나 꿈꾸는 집을 짓는 놀이이기도 했고, 다양한 구조물을 만들면서 상상의 날개를 펴는 일이기도 했다. 위인 중에 가우디 같은 건축가가 있었더라면 건축가의 꿈을 키울 수도 있었을까? 위인전을 읽으면서 나도 노력하면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되었다. 자신에 대한 기대 수준이 높아져 그야말로 ‘꿈’을 꾸게 된 것이다.
‘꿈’의 부작용은 현실 직시를 방해한다는 점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면서 신분제가 사라지고 누구나 직업 선택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만 모두가 같은 선택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개천에서도 용이 날 수 있다지만 우리 사회에서 그 용은 잘해야 판검사가 되어 기득권의 시중을 드는 것이었다. 더욱이 사회가 안정되면서 개천은 점점 말라붙어 잉어는커녕 붕어도 살기 힘든 곳이 되었다. 공장 노동자 아버지와 마트 점원인 엄마를 보면서 자라는 아이는 어떤 꿈을 꿀까.
세계의 위인 전기에 등장하는 위인들 가운데 아이들에게 가장 친숙했던 위인은 에디슨, 링컨 같은 미국인들이었다. 전쟁과 미군정을 거치면서 불어닥친 미국 바람의 영향일까, 미국의 원조 물자 덕분에 배를 곯지 않을 수 있었던 덕분일까. 모든 위인은 미화되기 마련이고 그런 상징조작이 아이들의 성장에 도움이 된 측면도 있겠지만, 미국의 위인들에 대한 미화는 미국에 대한 미화로 이어졌다. 미국(美國)이라는 나라 이름부터 미화된 국명이었다.(패전 후 미국의 속국이 되다시피한 일본은 ‘美國’ 아닌 ‘米國’이라 부르며 무너진 자존심을 세웠다.)
당시 위인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비 또한 남성이 압도적이어서 여자아이들의 경우 롤모델로 삼을 만한 위인이 거의 없었다. 100명이 넘는 한국 위인 가운데 여성은 신사임당, 유관순 정도였다. 세계 위인전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아 잔다르크, 나이팅게일, 퀴리 부인(마리 퀴리가 아닌 ‘퀴리 부인’으로 알려졌다) 정도가 여성이었다. 이들 중 평범한 여자어린이가 모델로 삼을 만한 위인은 간호사로 알려진 나이팅게일 정도였을 것이다.
교사는 위인의 반열에 들지 않았다. 페스탈로치 같은 이가 그나마 교사에 가까웠을까.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따지고 보면 교사였지만, 성인들을 가르치는 ‘스승’이지 교사로 여기지는 않았다. 톨스토이도 한때 교사였고 농노 아이들을 위한 학교도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신명을 바쳤지만, 교사보다 대문호로서 위인 반열에 든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위인’이 하기에는 너무 ‘쪼잔한’ 일인 걸까? 역사적으로 교사가 위인으로 인식된 시기는 없는 듯하다. 헬렌 켈러는 위인전에 등장하지만 그를 있게 한 교사 설리번은 조연에 머문다.
근대 이후 동서양의 아이들에게 ‘교사’는 꿈이 아니라 현실적인 직업일 뿐이었다. 미국 개척시대에 교사는 말 그대로 ‘빌어먹는’ 직업에 가까워, 달리 할 일이 없는 남자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20세기 들어 여성들이 교직에 진출하면서 교사의 질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구제금융 사태 이후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교직이 인기 직종이 되면서 교사를 ‘꿈꾸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민원으로 인한 고소·고발에 시달리면서 병가를 내거나 퇴직하는 교사들이 늘어나고 인구가 줄어들면서 임용 문이 좁아져 교대와 사범대 지원자가 급격히 줄고 있다.
교사는 성장기 아이들에게 부모 다음으로 가까운 어른이자 성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다. 가까운 사람을 위인으로 바라보기는 힘들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다. 예언자도 고향에서는 인정받기 어려운 법이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꿈을 갖게 하고, 위인이라는 존재가 있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면 된다. 위인들의 삶이 왜곡되고 부풀려지긴 하지만 위인전이 갖는 순기능이 있다. 인간이 저런 존재도 될 수 있다는 이상을 아이들에게 불어넣어준다.
공자가 주 문공을 스승으로 삼고 그 시절을 이상적인 사회로 묘사한 것은 그런 세상이 가능하다는 꿈을 사람들에게 불어 넣어준 것이다. 기록물도 변변찮던 시절 수백 년 전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그럴듯하게 풀어낸 창작물에 가까웠지만 그런 이야기가 갖는 힘이 있다. 실제로 공자 시대보다 5백 년도 이전 세상이 더 나았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그런 황금시대를 설정함으로써 당대의 한계를 넘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배움과 성장이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장치인 셈이다.
예전에는 그런 것이 가능했다는 이야기, 누군가가 벽을 넘어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 벽을 넘어서기가 수월해진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생기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스승을 모신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하는 배우는 자의 자세를 갖는 것이다.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인물일지라도, 책 속의 인물일지라도 위인은 스승 역할을 할 수 있다. 위인과 자신의 간극이 너무 크게 다가와 지레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면.
꿈꾸기를 부추기는 시대
2천년대 들어 위인전은 보다 현대적이고 덜 교훈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과학 이야기 ‘WHY’ 시리즈를 벤치마킹한 ‘WHO’ 시리즈는 유명한 운동선수나 연예인들을 등장시켜 아이들의 꿈을 자극한다. 방송인 유재석,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아이들이 선망할 법한 유명인을 롤모델로 내세워 초등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만화 인물전이다. 초기에는 전통적인 위인전도 냈지만 최근에는 거의 동시대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아이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는 듯하다. TV에서도 자주 보는 사람들을 책으로 만나면 아이들의 꿈이 좀 더 구체화될까.
2천년대 들어 ‘꿈’이 교육계의 화두가 되었다. 1995년에 나온 5.31 교육개혁안이 추구한 수요자 중심, 학습자 중심 교육의 큰 흐름에 따른 것이지만, 아이들이 학습과 학교 자체에 흥미를 잃어가면서 진보와 보수를 불문하고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려 애써왔다. 박근혜 정부는 자유학기제를 추진하면서 ‘꿈과 끼를 살리는 교육’을 아젠다로 내걸었다. ‘WHO’ 시리즈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지금까지 3백여 권이 나왔는데, 인기 있는 사람이면 가리지 않고 (심지어 본인 허락도 없이) 소개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사실 검증도 제대로 하지 않고 미화된 이야기가 많아 말 그대로 ‘만화 같은’ 인물전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 편이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무엇보다 ‘인기 있는 사람’,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롤모델이다. ‘인기 유투버’를 꿈꾸는 아이들이 부쩍 늘었으니 조만간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자랑하는 인플루언서도 시리즈에 등장할 것이다. 1인미디어 시대에 접어들어 주목을 끌기 위해 별짓을 다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시류에 출판계도 영합하는 모양새다. 개인의 자질과 주변 환경, 운이 상승작용하여 성공한 극소수의 유명인을 롤모델로 내세우는 것이 과연 교육적일까. 팔리기만 한다면 어떤 책이든 내는 출판인과 인기를 끌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려 드는 아이들은 궁합이 잘 맞는 조합이긴 하다.
아이들에게 꿈꾸기를 부추기는 시대이지만 오늘날 이 땅의 많은 아이들에게 꿈은 사치품에 가깝다. 내일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는 아이들, 그저 하루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것도 벅찬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묻는 어른은 무책임하다. 생필품도 구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사치품은 그야말로 ‘꿈 같은’ 것이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걸을 수 없듯이, 가까운 이들과의 관계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가지를 뻗을 수 없다. 세상에 뿌리를 내릴 수 있으려면 자신의 발밑을 살피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를 우러러보기보다 자신의 부모를 한 인간으로 마주볼 줄 아는 눈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럴 때 그의 삶도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가지를 뻗을 수 있지 않을까. 가까운 이의 삶에 눈을 뜨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사는 길이다. 전태일은 어려서 그런 눈을 떴다. 청계천 골방에서 함께 일하는 여공들의 삶에 눈을 뜨면서 그는 세상에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 훨훨 날아갈 만큼 큰 날개를 펼쳤다. 뿌리와 날개는 함께 자라는 법이다.
철 없던 사람도 부모가 되면 세상에 뿌리를 내린다.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꿈보다 아이들을 더 사랑해서 꿈일랑 가슴 한켠에 접어두고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한다. 지금 하는 일이 가슴 뛰는 일은 아닐지라도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고 아이 학비라도 마련할 수 있다면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철없는 자식이 게임에 빠져 밤낮을 분간하지 못해도 갖고 싶어 하는 게임기를 사주고 싶은 것이 엄마의 마음이다. 자식을 위하는 그 마음이 세상을 돌아가게 만든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드셨다’는 말처럼 어머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위인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위인전의 명암
어렸을 때 계몽사에서 펴낸 30권짜리 <소년소녀위인전집>을 끼고 살았다. 어려운 살림에 어머님이 큰맘 먹고 사주신 것이었다. 집에는 달리 읽을 책이 없기도 했고 텔레비전도 없어 밖에서 놀지 않을 때면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위인전을 읽고 또 읽는 것이었다. 강감찬, 이성계 같은 인물들보다 원효, 이상재 같은 인물에 더 끌렸던 걸 보면 기질은 타고나는 듯하다.
위인 전집은 양장본에 꽤 두꺼운 책이었는데, 읽기가 시들해지면 서른 권의 책을 블럭처럼 활용해 집을 짓곤 했다. 단칸방을 벗어나 꿈꾸는 집을 짓는 놀이이기도 했고, 다양한 구조물을 만들면서 상상의 날개를 펴는 일이기도 했다. 위인 중에 가우디 같은 건축가가 있었더라면 건축가의 꿈을 키울 수도 있었을까? 위인전을 읽으면서 나도 노력하면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되었다. 자신에 대한 기대 수준이 높아져 그야말로 ‘꿈’을 꾸게 된 것이다.
‘꿈’의 부작용은 현실 직시를 방해한다는 점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면서 신분제가 사라지고 누구나 직업 선택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만 모두가 같은 선택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개천에서도 용이 날 수 있다지만 우리 사회에서 그 용은 잘해야 판검사가 되어 기득권의 시중을 드는 것이었다. 더욱이 사회가 안정되면서 개천은 점점 말라붙어 잉어는커녕 붕어도 살기 힘든 곳이 되었다. 공장 노동자 아버지와 마트 점원인 엄마를 보면서 자라는 아이는 어떤 꿈을 꿀까.
세계의 위인 전기에 등장하는 위인들 가운데 아이들에게 가장 친숙했던 위인은 에디슨, 링컨 같은 미국인들이었다. 전쟁과 미군정을 거치면서 불어닥친 미국 바람의 영향일까, 미국의 원조 물자 덕분에 배를 곯지 않을 수 있었던 덕분일까. 모든 위인은 미화되기 마련이고 그런 상징조작이 아이들의 성장에 도움이 된 측면도 있겠지만, 미국의 위인들에 대한 미화는 미국에 대한 미화로 이어졌다. 미국(美國)이라는 나라 이름부터 미화된 국명이었다.(패전 후 미국의 속국이 되다시피한 일본은 ‘美國’ 아닌 ‘米國’이라 부르며 무너진 자존심을 세웠다.)
당시 위인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비 또한 남성이 압도적이어서 여자아이들의 경우 롤모델로 삼을 만한 위인이 거의 없었다. 100명이 넘는 한국 위인 가운데 여성은 신사임당, 유관순 정도였다. 세계 위인전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아 잔다르크, 나이팅게일, 퀴리 부인(마리 퀴리가 아닌 ‘퀴리 부인’으로 알려졌다) 정도가 여성이었다. 이들 중 평범한 여자어린이가 모델로 삼을 만한 위인은 간호사로 알려진 나이팅게일 정도였을 것이다.
교사는 위인의 반열에 들지 않았다. 페스탈로치 같은 이가 그나마 교사에 가까웠을까.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따지고 보면 교사였지만, 성인들을 가르치는 ‘스승’이지 교사로 여기지는 않았다. 톨스토이도 한때 교사였고 농노 아이들을 위한 학교도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신명을 바쳤지만, 교사보다 대문호로서 위인 반열에 든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위인’이 하기에는 너무 ‘쪼잔한’ 일인 걸까? 역사적으로 교사가 위인으로 인식된 시기는 없는 듯하다. 헬렌 켈러는 위인전에 등장하지만 그를 있게 한 교사 설리번은 조연에 머문다.
근대 이후 동서양의 아이들에게 ‘교사’는 꿈이 아니라 현실적인 직업일 뿐이었다. 미국 개척시대에 교사는 말 그대로 ‘빌어먹는’ 직업에 가까워, 달리 할 일이 없는 남자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20세기 들어 여성들이 교직에 진출하면서 교사의 질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구제금융 사태 이후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교직이 인기 직종이 되면서 교사를 ‘꿈꾸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민원으로 인한 고소·고발에 시달리면서 병가를 내거나 퇴직하는 교사들이 늘어나고 인구가 줄어들면서 임용 문이 좁아져 교대와 사범대 지원자가 급격히 줄고 있다.
교사는 성장기 아이들에게 부모 다음으로 가까운 어른이자 성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다. 가까운 사람을 위인으로 바라보기는 힘들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다. 예언자도 고향에서는 인정받기 어려운 법이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꿈을 갖게 하고, 위인이라는 존재가 있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면 된다. 위인들의 삶이 왜곡되고 부풀려지긴 하지만 위인전이 갖는 순기능이 있다. 인간이 저런 존재도 될 수 있다는 이상을 아이들에게 불어넣어준다.
공자가 주 문공을 스승으로 삼고 그 시절을 이상적인 사회로 묘사한 것은 그런 세상이 가능하다는 꿈을 사람들에게 불어 넣어준 것이다. 기록물도 변변찮던 시절 수백 년 전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그럴듯하게 풀어낸 창작물에 가까웠지만 그런 이야기가 갖는 힘이 있다. 실제로 공자 시대보다 5백 년도 이전 세상이 더 나았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그런 황금시대를 설정함으로써 당대의 한계를 넘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배움과 성장이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장치인 셈이다.
예전에는 그런 것이 가능했다는 이야기, 누군가가 벽을 넘어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 벽을 넘어서기가 수월해진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생기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스승을 모신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하는 배우는 자의 자세를 갖는 것이다.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인물일지라도, 책 속의 인물일지라도 위인은 스승 역할을 할 수 있다. 위인과 자신의 간극이 너무 크게 다가와 지레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면.
꿈꾸기를 부추기는 시대
2천년대 들어 위인전은 보다 현대적이고 덜 교훈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과학 이야기 ‘WHY’ 시리즈를 벤치마킹한 ‘WHO’ 시리즈는 유명한 운동선수나 연예인들을 등장시켜 아이들의 꿈을 자극한다. 방송인 유재석,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아이들이 선망할 법한 유명인을 롤모델로 내세워 초등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만화 인물전이다. 초기에는 전통적인 위인전도 냈지만 최근에는 거의 동시대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아이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는 듯하다. TV에서도 자주 보는 사람들을 책으로 만나면 아이들의 꿈이 좀 더 구체화될까.
2천년대 들어 ‘꿈’이 교육계의 화두가 되었다. 1995년에 나온 5.31 교육개혁안이 추구한 수요자 중심, 학습자 중심 교육의 큰 흐름에 따른 것이지만, 아이들이 학습과 학교 자체에 흥미를 잃어가면서 진보와 보수를 불문하고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려 애써왔다. 박근혜 정부는 자유학기제를 추진하면서 ‘꿈과 끼를 살리는 교육’을 아젠다로 내걸었다. ‘WHO’ 시리즈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지금까지 3백여 권이 나왔는데, 인기 있는 사람이면 가리지 않고 (심지어 본인 허락도 없이) 소개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사실 검증도 제대로 하지 않고 미화된 이야기가 많아 말 그대로 ‘만화 같은’ 인물전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 편이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무엇보다 ‘인기 있는 사람’,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롤모델이다. ‘인기 유투버’를 꿈꾸는 아이들이 부쩍 늘었으니 조만간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자랑하는 인플루언서도 시리즈에 등장할 것이다. 1인미디어 시대에 접어들어 주목을 끌기 위해 별짓을 다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시류에 출판계도 영합하는 모양새다. 개인의 자질과 주변 환경, 운이 상승작용하여 성공한 극소수의 유명인을 롤모델로 내세우는 것이 과연 교육적일까. 팔리기만 한다면 어떤 책이든 내는 출판인과 인기를 끌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려 드는 아이들은 궁합이 잘 맞는 조합이긴 하다.
아이들에게 꿈꾸기를 부추기는 시대이지만 오늘날 이 땅의 많은 아이들에게 꿈은 사치품에 가깝다. 내일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는 아이들, 그저 하루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것도 벅찬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묻는 어른은 무책임하다. 생필품도 구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사치품은 그야말로 ‘꿈 같은’ 것이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걸을 수 없듯이, 가까운 이들과의 관계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가지를 뻗을 수 없다. 세상에 뿌리를 내릴 수 있으려면 자신의 발밑을 살피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를 우러러보기보다 자신의 부모를 한 인간으로 마주볼 줄 아는 눈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럴 때 그의 삶도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가지를 뻗을 수 있지 않을까. 가까운 이의 삶에 눈을 뜨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사는 길이다. 전태일은 어려서 그런 눈을 떴다. 청계천 골방에서 함께 일하는 여공들의 삶에 눈을 뜨면서 그는 세상에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 훨훨 날아갈 만큼 큰 날개를 펼쳤다. 뿌리와 날개는 함께 자라는 법이다.
철 없던 사람도 부모가 되면 세상에 뿌리를 내린다.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꿈보다 아이들을 더 사랑해서 꿈일랑 가슴 한켠에 접어두고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한다. 지금 하는 일이 가슴 뛰는 일은 아닐지라도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고 아이 학비라도 마련할 수 있다면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철없는 자식이 게임에 빠져 밤낮을 분간하지 못해도 갖고 싶어 하는 게임기를 사주고 싶은 것이 엄마의 마음이다. 자식을 위하는 그 마음이 세상을 돌아가게 만든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드셨다’는 말처럼 어머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위인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