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닝'이 가르쳐주는 것들
수학 시험 때 민석이네 반 친구들은 반장의 답안지를 보고 컨닝을 하기로 약속했다. 반장 뒤에 앉은 민석이가 컨닝을 해서 자신 있게 답을 베껴 쓰자, 다른 친구들도 민석이가 쓴 답 '1092'를 베꼈다. 그런데 시험이 끝난 뒤 민석이는 알게 되었다. 정답이 'log2'라는 걸.
(그림-강풀 만화-바로가기 http://blog.naver.com/ss4584/40003617670)
민석이를 흉볼 일은 아니다. 반장을 했던 친구도 아마 지금쯤은 log가 뭔지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log가 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쓰는 사람도 모르긴 마찬가지다. log니 √니 같은 이상한 기호를 배운 기억은 어렴풋이 나지만, 어디에 쓰이는 건지 모르는 채 그냥 계산법만 익혔었다. 수학 시험이랑 담을 쌓고 나서는 그런 기호들을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걸로 봐서 몰라도 괜찮은 것들인 것 같다.
우등생과 열등생의 차이가 무엇인가? 외운 것을 시험 본 뒤에 잊으면 우등생이 되고, 시험 전에 잊어버리면 열등생이 되는 것이 바로 학교 시스템 아닌가. 컨닝은 이 시스템에 숨은 버그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열등생도 경우에 따라서는 우등생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이 버그의 특징은 결코 시스템을 망가뜨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간혹 컨닝이 문제가 되어 시험을 다시 보는 경우는 있어도, 컨닝 때문에 시험이라는 평가제도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컨닝 때문에 열등생과 우등생의 순서가 좀 바뀐다 해도 전체 시스템으로 볼 때는 문제될 것이 없다. 등수 매기는 것이 학교 시험의 본래 목적이기 때문이다.
언론과 사회는 '부정행위'라고 매도하지만, 다른 눈으로 보면 컨닝은 지금 같은 교육과 시험제도에 대한 나름의 '조롱'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선착순 달리기 같은 입시 경쟁에서 페어플레이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편법이 판치는 사회에서 정직한 아이들을 기대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족집게 고액 과외를 하는 것이 컨닝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은 것이다. 돈이 많이 드느냐 적게 드느냐의 차이일 뿐. 가장 돈이 적게 드는 편법이 스스로 해결하는 컨닝 페이퍼라면 반대편 정점에는 한 달에 천만 원씩 쏟아붓는 족집게 과외가 있는 셈이다. 그 중간에 휴대폰 문자 메시지나 대리 시험 같이 몇 십, 몇 백만 원씩 드는 다양한 편법들이 존재한다.
아마도 컨닝의 역사는 시험의 역사와 같을 것이다. 옛날 과거시험에서는 붓 대롱 속에 컨닝 페이퍼를 숨기는 방법이 곧잘 쓰였다고 하니, 21세기에 이르러 컨닝 기술이 첨단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학교교육은 적어도 컨닝 기법에서만큼은 확실히 창의력을 길러주는 셈이다. 학교에서 애써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휴대폰의 그 복잡한 기능들을 잘도 배워서는 어른들이 미처 상상하지 못한 용도로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엄지족이라 불리는 아이들은 엄지손가락 하나만으로 1분에 3백 타가 넘는 문자 전송 실력을 자랑한다고 하니, 평소에 갈고 닦은 실력이 수능시험 때도 십분 발휘된 셈이다.
실제로 많은 아이들이 시험을 통해서 얻는 것은 이처럼 컨닝 방법을 궁리하고 구사하는 전략과 전술을 통해 터득하는 갖가지 요령들이 아닐까? 보다 효과적인 컨닝 페이퍼를 만들기 위한 기발한 발상들, 최소한의 공간에 최대한의 내용을 집어넣기 위해 짜내는 그 창의력은 시험 공부만 해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다. 게다가 시험장에서 발휘되는 그 다양한 기술들―절묘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기회 포착 능력과 결단력, 단번에 원하는 정보를 파악하는 순발력, 들킬 뻔했을 때 시침을 떼는 위장술, 들켰을 때 둘러대는 임기응변술, 시험이 없다면 이런 많은 능력들을 어떻게 기를 수 있겠는가. 사실 사회에 나가면 미적분 문제를 푸는 능력보다 이런 능력들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미적분이나 하상계수가 가장 높은 강 이름을 아는 것이 살아가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컨닝을 잘 하던 아이들이 실제로 사회에서도 눈치 빠르게 처신해서 성공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학교는 참 다양한 방식으로 아이들을 돕고 있는 것 같다. 난관에 봉착해서도 자포자기하지 않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능력은 살아가는 데 적잖게 힘이 되어줄 것이다. 더욱이 컨닝을 도와주는 공범의식 속에 깊어가는 우정, 답안지를 보여준 친구에 대한 무한한 신뢰, 답을 보여준 친구보다 더 높은 점수가 나오지 않게 배려하는 절제심. 시험은 이런 덕목들도 길러준다. 애써 가르치지 않아도 이런 것들이 저절로 교육되는 것을 보면, 학교는 상당히 고차원의 교육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컨닝의 도
대학가에서 유행하는 우스갯소리에 '컨닝의 도'가 있다. 아마도 한 소식한 진짜 도사들이 나름대로 터득한 심오한 컨닝의 세계를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리라.
제1도는 감독자와 우등생의 위치를 아는 것이니, 이를 지(知)라 한다.
제2도는 감독자가 바로 앞에 있어도 과감하게 시도해야 하니, 이를 용(勇)이라 한다.
제3도는 컨닝한 답이 이상해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니, 이를 신(信)이라 한다.
제4도는 남이 컨닝하다 들킨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니, 이를 인(仁)이라 한다.
제5도는 컨닝하다 들켜도 컨닝의 근원지를 밝히지 않는 것이니, 이를 의(義)라 한다.
제6도는 보여준 사람보다 점수가 낮게 나오도록 베끼는 것이니, 이를 예(禮)라 한다.
컨닝을 언론에서는 부정행위로 매도하지만, 학교에서는 다들 그다지 부정한 행위로 여겨지지 않는 실정이다. '컨닝의 도' 같은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배경도 그런 데 있을 것이다. 심지어 전국 모의고사를 볼 때면 컨닝을 해서라도 학교 석차를 높여주기를 바라는 학교와 교사들의 암묵적인 동의 아래 공공연히 컨닝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컨닝이 학교 명예를 높이는 수단이 되기도 하는 이 아이러니가 학교의 가치 전도顚倒 교육을 잘 드러낸다. 강제로 '자율' 학습을 하게 하는 것처럼.
컨닝은 사실 중고등학교보다 대학에서 더 많이 하는 편이다. 대학 시험조차 컨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다보니, 실제로 컨닝 기술이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을 정도다. 운이 좋으면 컨닝 인생을 살면서도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학생 리포트를 표절해서 연구 논문을 쓰는 교수, 남의 노래를 표절하는 가수, 남의 글을 자기 글인 양 책을 내는 작가도 있는 걸 보면, 컨닝의 세계는 참으로 넓고도 깊다.
학생들도 컨닝을 시험 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컨닝은 사실상 평소에 하는 숙제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 한다. 참고서를 보고 베끼는 숙제가 컨닝과 다를 바가 있는가. 연필을 서너 자루씩 묶어서 마구 낙서하듯이 연습장을 메우는 '깜지' 또는 '빽빽이'라는 숙제도 다르지 않다. 초등학생들이 인터넷 사이트에서 뽑은 자료들을 짜깁기해서 내는 숙제, 그것도 엄마가 다 해주다시피 하는 숙제는 컨닝과 대리 시험의 예행연습이 아닌가.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수능 시험 때 부정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학에 가서는 짜깁기 리포트를 써내고 시험 때는 공공연히 컨닝을 해 학점을 유지하다가 사회에 나가서는 이중 장부, 공문서 위조를 비롯한 갖은 편법을 구사하는 '유능한' 사회인이 되는 것이다.
좁은 책상 한가운데 책가방을 올려놓고서도 서로 볼까봐 시험지를 팔로 가리고 고개를 처박고서 시험을 보던 아이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 슬픈 풍경의 연장선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경쟁 사회는 경쟁 학습의 연장선에 있고, 시험은 경쟁 학습 방식과 뗄 수 없는 평가 방식이다. 경쟁이 심한 사회가 더 좋은 사회라고 강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상이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않으냐고 하지만, 경쟁을 부추기지 않으면서 실력을 키우는 사회도 있다. 진짜 실력은 경쟁의 결과이기보다는 협력의 결과인 경우가 더 많다. 협력은 몰입을 도와주지만 경쟁은 오히려 몰입을 방해한다. 뭔가에 진실로 몰입할 때 비로소 창의성도 생겨나는 것이다.
경쟁이 필요하다는 거짓 이데올로기에서 깨어나야 한다. 경쟁은 경쟁 당사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다. 경쟁 학습보다 프로젝트 방식의 협력 학습 쪽이 학습에 더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는 만큼, 새로운 학습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대안교육이 해야 할 일은 그런 일이다. 시험 없는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시험이 없을 때 오히려 진짜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미 많은 현장들이 보여주고 있다. 교육 방식이 달라지면 따라서 평가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지금 같은 시험제도는 진정한 학습 동기를 불러일으키지도 못하고 오히려 갉아먹는다. 시험이 다가오면 공부가 더 하기 싫어지다가 시험이 끝나자마자 '진짜 공부'가 하고 싶어져서 시험 전날보다 더 일찍 일어나 책을 뒤적이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문제부터 제대로 보자
제대로 된 평가는 서열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학습 의욕을 북돋우고 자기를 돌아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 메트스쿨에서 하듯이 자신이 배운 것이나 작업 결과를 사람들 앞에서 소개하는 프레젠테이션을 통한 평가는 그 자체가 학생에게 많은 도움을 주면서 동시에 학생의 다양한 면을 평가할 수 있는 방식이다. 또는 오픈 북(open book) 시험을 볼 수도 있다. 진짜 실력은 문제 해결에 필요한 정보를 책에서 찾아보면서 그것을 적용할 줄 아는 능력이므로, 꼭 필기시험을 봐야 한다면 그런 시험문제를 내면 된다. 이런 평가 방식에서는 아무리 부정행위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부정이 판치는 사회를 원하지 않는다면 부정행위 방지책을 고민할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컨닝으로 실력을 눈가림할 수 있는 시험이라면 그것은 제대로 된 평가 방식이 아니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시험장에서 휴대폰 소지를 금지한다거나 하는 단세포적인 처방을 내릴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시험이라는 평가제도 자체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대학 입학에서도 평가를 시험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대학에 자율적인 평가권을 주고 저마다 원하는 방식으로 평가하도록 맡겨두는 것이 현명한 대책일 것이다. 욕먹을 소리 같지만, 고교 등급제로 강남 출신 학생들을 무더기로 뽑는다면 그것도 그 학교의 평가 방식으로 인정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동문들을 서울 강남 출신들로 채우기를 바라는 대학이 언제까지고 일류 대학으로 남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평가 방식이든, 남들 모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아무리 주관적인 평가라 해도 투명하게만 이루어진다면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다.
컨닝이나 내신 부풀리기 같은 것 때문에 대학이 고등학교의 평가를 신뢰하지 않는 마당에 아무리 객관식 시험을 보고 내신을 강조해봐야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이다. 기업들이 그렇듯이 대학들도 실력 있는 학생들을 뽑기 위해 저마다 애쓸 것이므로, 자율권을 주면 내신이나 수능 점수 같은 엉터리 평가 자료에 의존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고등학교로서도 대학에서 신뢰하지 않는 평가 방식을 고수할 이유도 여력도 없을 것이므로 새로운 평가 방식을 택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객관식 평가가 아닌 포트폴리오나 프리젠테이션, 면접 같은 주관적인 평가는 평가 주체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한다. 우리 사회는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기에 객관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렇게 해서는 영영 불신 사회를 면치 못할 것이다. 신뢰는 결코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는 만큼, 주관적인 평가가 당장은 미심쩍더라도 일단 믿고 맡겨야 한다. 평가 주체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평가 대상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평가를 하려고 할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평가의 노하우가 쌓이고 신뢰도도 높아질 것이다.
이번 휴대폰 컨닝 사건이 교육과 평가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로 이어지지 못하고 부정행위를 밝혀내는 데만 머문다면 사실상 별 의미 없는 소동으로 끝나버릴 것이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소동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회를 통해 우리 교육과 사회의 실상을 직시하고, 신뢰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기여하는 쪽으로 교육 시스템을 바꿔간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문제를 제대로 보면 그 안에 답이 있다. 어디 쉬운 답 없나 컨닝할 궁리 그만하고 문제부터 제대로 보자.(현병호/민들레 발행인. 이 글은 격월간 민들레 36호에 실린 글입니다.)
* 개정 한글 맞춤법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cunning를 '커닝'이라 표기하도록 정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일상에서 실제로 쓰는 표현 그대로 '컨닝'이라 표기했습니다. 짜장면을 '자장면'이라 표기할 때 그 맛이 안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커닝은 컨닝의 그 오묘한 느낌을 전하지 못한다고 봅니다. 짬뽕은 차마 '잠봉'이라 표기하지 못한 걸 보면 학자들 혀도 종이로 만들어진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컨닝'이 가르쳐주는 것들
수학 시험 때 민석이네 반 친구들은 반장의 답안지를 보고 컨닝을 하기로 약속했다. 반장 뒤에 앉은 민석이가 컨닝을 해서 자신 있게 답을 베껴 쓰자, 다른 친구들도 민석이가 쓴 답 '1092'를 베꼈다. 그런데 시험이 끝난 뒤 민석이는 알게 되었다. 정답이 'log2'라는 걸.
(그림-강풀 만화-바로가기 http://blog.naver.com/ss4584/40003617670)
민석이를 흉볼 일은 아니다. 반장을 했던 친구도 아마 지금쯤은 log가 뭔지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log가 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쓰는 사람도 모르긴 마찬가지다. log니 √니 같은 이상한 기호를 배운 기억은 어렴풋이 나지만, 어디에 쓰이는 건지 모르는 채 그냥 계산법만 익혔었다. 수학 시험이랑 담을 쌓고 나서는 그런 기호들을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걸로 봐서 몰라도 괜찮은 것들인 것 같다.
우등생과 열등생의 차이가 무엇인가? 외운 것을 시험 본 뒤에 잊으면 우등생이 되고, 시험 전에 잊어버리면 열등생이 되는 것이 바로 학교 시스템 아닌가. 컨닝은 이 시스템에 숨은 버그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열등생도 경우에 따라서는 우등생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이 버그의 특징은 결코 시스템을 망가뜨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간혹 컨닝이 문제가 되어 시험을 다시 보는 경우는 있어도, 컨닝 때문에 시험이라는 평가제도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컨닝 때문에 열등생과 우등생의 순서가 좀 바뀐다 해도 전체 시스템으로 볼 때는 문제될 것이 없다. 등수 매기는 것이 학교 시험의 본래 목적이기 때문이다.
언론과 사회는 '부정행위'라고 매도하지만, 다른 눈으로 보면 컨닝은 지금 같은 교육과 시험제도에 대한 나름의 '조롱'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선착순 달리기 같은 입시 경쟁에서 페어플레이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편법이 판치는 사회에서 정직한 아이들을 기대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족집게 고액 과외를 하는 것이 컨닝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은 것이다. 돈이 많이 드느냐 적게 드느냐의 차이일 뿐. 가장 돈이 적게 드는 편법이 스스로 해결하는 컨닝 페이퍼라면 반대편 정점에는 한 달에 천만 원씩 쏟아붓는 족집게 과외가 있는 셈이다. 그 중간에 휴대폰 문자 메시지나 대리 시험 같이 몇 십, 몇 백만 원씩 드는 다양한 편법들이 존재한다.
아마도 컨닝의 역사는 시험의 역사와 같을 것이다. 옛날 과거시험에서는 붓 대롱 속에 컨닝 페이퍼를 숨기는 방법이 곧잘 쓰였다고 하니, 21세기에 이르러 컨닝 기술이 첨단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학교교육은 적어도 컨닝 기법에서만큼은 확실히 창의력을 길러주는 셈이다. 학교에서 애써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휴대폰의 그 복잡한 기능들을 잘도 배워서는 어른들이 미처 상상하지 못한 용도로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엄지족이라 불리는 아이들은 엄지손가락 하나만으로 1분에 3백 타가 넘는 문자 전송 실력을 자랑한다고 하니, 평소에 갈고 닦은 실력이 수능시험 때도 십분 발휘된 셈이다.
실제로 많은 아이들이 시험을 통해서 얻는 것은 이처럼 컨닝 방법을 궁리하고 구사하는 전략과 전술을 통해 터득하는 갖가지 요령들이 아닐까? 보다 효과적인 컨닝 페이퍼를 만들기 위한 기발한 발상들, 최소한의 공간에 최대한의 내용을 집어넣기 위해 짜내는 그 창의력은 시험 공부만 해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다. 게다가 시험장에서 발휘되는 그 다양한 기술들―절묘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기회 포착 능력과 결단력, 단번에 원하는 정보를 파악하는 순발력, 들킬 뻔했을 때 시침을 떼는 위장술, 들켰을 때 둘러대는 임기응변술, 시험이 없다면 이런 많은 능력들을 어떻게 기를 수 있겠는가. 사실 사회에 나가면 미적분 문제를 푸는 능력보다 이런 능력들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미적분이나 하상계수가 가장 높은 강 이름을 아는 것이 살아가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컨닝을 잘 하던 아이들이 실제로 사회에서도 눈치 빠르게 처신해서 성공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학교는 참 다양한 방식으로 아이들을 돕고 있는 것 같다. 난관에 봉착해서도 자포자기하지 않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능력은 살아가는 데 적잖게 힘이 되어줄 것이다. 더욱이 컨닝을 도와주는 공범의식 속에 깊어가는 우정, 답안지를 보여준 친구에 대한 무한한 신뢰, 답을 보여준 친구보다 더 높은 점수가 나오지 않게 배려하는 절제심. 시험은 이런 덕목들도 길러준다. 애써 가르치지 않아도 이런 것들이 저절로 교육되는 것을 보면, 학교는 상당히 고차원의 교육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컨닝의 도
대학가에서 유행하는 우스갯소리에 '컨닝의 도'가 있다. 아마도 한 소식한 진짜 도사들이 나름대로 터득한 심오한 컨닝의 세계를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리라.
제1도는 감독자와 우등생의 위치를 아는 것이니, 이를 지(知)라 한다.
제2도는 감독자가 바로 앞에 있어도 과감하게 시도해야 하니, 이를 용(勇)이라 한다.
제3도는 컨닝한 답이 이상해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니, 이를 신(信)이라 한다.
제4도는 남이 컨닝하다 들킨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니, 이를 인(仁)이라 한다.
제5도는 컨닝하다 들켜도 컨닝의 근원지를 밝히지 않는 것이니, 이를 의(義)라 한다.
제6도는 보여준 사람보다 점수가 낮게 나오도록 베끼는 것이니, 이를 예(禮)라 한다.
컨닝을 언론에서는 부정행위로 매도하지만, 학교에서는 다들 그다지 부정한 행위로 여겨지지 않는 실정이다. '컨닝의 도' 같은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배경도 그런 데 있을 것이다. 심지어 전국 모의고사를 볼 때면 컨닝을 해서라도 학교 석차를 높여주기를 바라는 학교와 교사들의 암묵적인 동의 아래 공공연히 컨닝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컨닝이 학교 명예를 높이는 수단이 되기도 하는 이 아이러니가 학교의 가치 전도顚倒 교육을 잘 드러낸다. 강제로 '자율' 학습을 하게 하는 것처럼.
컨닝은 사실 중고등학교보다 대학에서 더 많이 하는 편이다. 대학 시험조차 컨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다보니, 실제로 컨닝 기술이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을 정도다. 운이 좋으면 컨닝 인생을 살면서도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학생 리포트를 표절해서 연구 논문을 쓰는 교수, 남의 노래를 표절하는 가수, 남의 글을 자기 글인 양 책을 내는 작가도 있는 걸 보면, 컨닝의 세계는 참으로 넓고도 깊다.
학생들도 컨닝을 시험 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컨닝은 사실상 평소에 하는 숙제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 한다. 참고서를 보고 베끼는 숙제가 컨닝과 다를 바가 있는가. 연필을 서너 자루씩 묶어서 마구 낙서하듯이 연습장을 메우는 '깜지' 또는 '빽빽이'라는 숙제도 다르지 않다. 초등학생들이 인터넷 사이트에서 뽑은 자료들을 짜깁기해서 내는 숙제, 그것도 엄마가 다 해주다시피 하는 숙제는 컨닝과 대리 시험의 예행연습이 아닌가.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수능 시험 때 부정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학에 가서는 짜깁기 리포트를 써내고 시험 때는 공공연히 컨닝을 해 학점을 유지하다가 사회에 나가서는 이중 장부, 공문서 위조를 비롯한 갖은 편법을 구사하는 '유능한' 사회인이 되는 것이다.
좁은 책상 한가운데 책가방을 올려놓고서도 서로 볼까봐 시험지를 팔로 가리고 고개를 처박고서 시험을 보던 아이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 슬픈 풍경의 연장선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경쟁 사회는 경쟁 학습의 연장선에 있고, 시험은 경쟁 학습 방식과 뗄 수 없는 평가 방식이다. 경쟁이 심한 사회가 더 좋은 사회라고 강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상이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않으냐고 하지만, 경쟁을 부추기지 않으면서 실력을 키우는 사회도 있다. 진짜 실력은 경쟁의 결과이기보다는 협력의 결과인 경우가 더 많다. 협력은 몰입을 도와주지만 경쟁은 오히려 몰입을 방해한다. 뭔가에 진실로 몰입할 때 비로소 창의성도 생겨나는 것이다.
경쟁이 필요하다는 거짓 이데올로기에서 깨어나야 한다. 경쟁은 경쟁 당사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다. 경쟁 학습보다 프로젝트 방식의 협력 학습 쪽이 학습에 더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는 만큼, 새로운 학습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대안교육이 해야 할 일은 그런 일이다. 시험 없는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시험이 없을 때 오히려 진짜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미 많은 현장들이 보여주고 있다. 교육 방식이 달라지면 따라서 평가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지금 같은 시험제도는 진정한 학습 동기를 불러일으키지도 못하고 오히려 갉아먹는다. 시험이 다가오면 공부가 더 하기 싫어지다가 시험이 끝나자마자 '진짜 공부'가 하고 싶어져서 시험 전날보다 더 일찍 일어나 책을 뒤적이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문제부터 제대로 보자
제대로 된 평가는 서열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학습 의욕을 북돋우고 자기를 돌아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 메트스쿨에서 하듯이 자신이 배운 것이나 작업 결과를 사람들 앞에서 소개하는 프레젠테이션을 통한 평가는 그 자체가 학생에게 많은 도움을 주면서 동시에 학생의 다양한 면을 평가할 수 있는 방식이다. 또는 오픈 북(open book) 시험을 볼 수도 있다. 진짜 실력은 문제 해결에 필요한 정보를 책에서 찾아보면서 그것을 적용할 줄 아는 능력이므로, 꼭 필기시험을 봐야 한다면 그런 시험문제를 내면 된다. 이런 평가 방식에서는 아무리 부정행위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부정이 판치는 사회를 원하지 않는다면 부정행위 방지책을 고민할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컨닝으로 실력을 눈가림할 수 있는 시험이라면 그것은 제대로 된 평가 방식이 아니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시험장에서 휴대폰 소지를 금지한다거나 하는 단세포적인 처방을 내릴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시험이라는 평가제도 자체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대학 입학에서도 평가를 시험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대학에 자율적인 평가권을 주고 저마다 원하는 방식으로 평가하도록 맡겨두는 것이 현명한 대책일 것이다. 욕먹을 소리 같지만, 고교 등급제로 강남 출신 학생들을 무더기로 뽑는다면 그것도 그 학교의 평가 방식으로 인정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동문들을 서울 강남 출신들로 채우기를 바라는 대학이 언제까지고 일류 대학으로 남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평가 방식이든, 남들 모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아무리 주관적인 평가라 해도 투명하게만 이루어진다면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다.
컨닝이나 내신 부풀리기 같은 것 때문에 대학이 고등학교의 평가를 신뢰하지 않는 마당에 아무리 객관식 시험을 보고 내신을 강조해봐야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이다. 기업들이 그렇듯이 대학들도 실력 있는 학생들을 뽑기 위해 저마다 애쓸 것이므로, 자율권을 주면 내신이나 수능 점수 같은 엉터리 평가 자료에 의존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고등학교로서도 대학에서 신뢰하지 않는 평가 방식을 고수할 이유도 여력도 없을 것이므로 새로운 평가 방식을 택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객관식 평가가 아닌 포트폴리오나 프리젠테이션, 면접 같은 주관적인 평가는 평가 주체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한다. 우리 사회는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기에 객관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렇게 해서는 영영 불신 사회를 면치 못할 것이다. 신뢰는 결코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는 만큼, 주관적인 평가가 당장은 미심쩍더라도 일단 믿고 맡겨야 한다. 평가 주체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평가 대상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평가를 하려고 할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평가의 노하우가 쌓이고 신뢰도도 높아질 것이다.
이번 휴대폰 컨닝 사건이 교육과 평가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로 이어지지 못하고 부정행위를 밝혀내는 데만 머문다면 사실상 별 의미 없는 소동으로 끝나버릴 것이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소동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회를 통해 우리 교육과 사회의 실상을 직시하고, 신뢰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기여하는 쪽으로 교육 시스템을 바꿔간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문제를 제대로 보면 그 안에 답이 있다. 어디 쉬운 답 없나 컨닝할 궁리 그만하고 문제부터 제대로 보자.(현병호/민들레 발행인. 이 글은 격월간 민들레 36호에 실린 글입니다.)
* 개정 한글 맞춤법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cunning를 '커닝'이라 표기하도록 정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일상에서 실제로 쓰는 표현 그대로 '컨닝'이라 표기했습니다. 짜장면을 '자장면'이라 표기할 때 그 맛이 안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커닝은 컨닝의 그 오묘한 느낌을 전하지 못한다고 봅니다. 짬뽕은 차마 '잠봉'이라 표기하지 못한 걸 보면 학자들 혀도 종이로 만들어진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