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사람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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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돼지고기가 아니다, 알다시피...
십대 아이들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하릴없이 거리를 싸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대로변에 수십, 수백 명씩 모여 이른바 ‘데모’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5월, 주말마다 서울 광화문 거리에는 ‘입시경쟁 교육에 희생된 학생들을 위한 촛불추모제’에 이어서, 두발자유화를 부르짖는 아이들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우리는 등급별로 매겨지는 돼지고기가 아니다” “내신등급제가 존재하는 한 고등학교 친구는 없다” “입시교육 KIN! 우리도 사람이거든~” “잘리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인권이다” 5월의 주말 광화문 거리에 울려 퍼진 이들 십대의 목소리는 우리 교육의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팔팔하게 살아 있는 아이들이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이 움직임을 보면서 4.19 이후 처음으로 십대 청소년들이 거리로 나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의미부여를 하기도 하고, 한편에서는 기껏 ‘두발자유’나 부르짖으려고 광화문까지 나왔냐고 평가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거대 담론이 아닌, 자신의 삶과 직결된 문제에 대해 아이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괄목할 만한 현상이다. ‘민주’의 내용이 보다 구체화되고 있는 셈이다.
스스로 민주국가라 자부하는 대한민국에서 학생들이 아직 학생자치회도 제대로 꾸릴 수 없고, 자기 머리 모양조차도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은 국가 정체성을 의심케 하는 일이다. 도덕 수업, 윤리 시험으로 민주시민을 기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자치회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들면서 민주시민 교육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텔레비전에서 날마다 머리 모양을 바꾸는 연예인을 보고 사는 아이들에게 아직도 ‘두발 단속’을 부르짖는 학교가 얼마나 ‘황당한’ 공간으로 비쳐지는지 ‘교육자’들은 알기나 하는 걸까?
그날 광화문에는 아이들보다 더 많은 수의 ‘교육자’들이 모였다. 학생주임 교사를 비롯해 교육청 장학사 등 수백 명에 이르는 ‘어른들’이 행사장을 에워싸고는 아이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교원평가제도는 교육을 망친다며 쌍수 들고 반대하는 교사들이 아이들을 고기덩이처럼 등급을 매겨 나누는 것은 교육적이라고 믿는 걸까? 물론 내신등급제가 한나절의 수능시험 점수로 아이들의 인생이 좌우되는 것을 보완하는 의미가 있기는 하다. 또 학원보다 인기 없는 학교에 아이들도 학부모도 좀더 신경을 쓰게 만들어, 교육부가 오매불망하는 ‘공교육 정상화’를 이루는 데도 일조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교육을 살리고 아이들을 살리는 길이 될 가망성은 보이지 않는다.
입시를 위한 평가는 그것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든 아이들의 성장을 위한 평가가 되기 어렵다. 시험이든 수행평가든 결국은 아이들을 틀에 맞추도록 만들고, 평가권을 쥔 교사의 눈치를 보게 만들기 마련이다. 내신등급제는 아이들을 3년 내내 ‘고3 긴장감’을 갖고 살도록 몰아갈 뿐만 아니라, 교사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한 일상적인 스트레스 또한 만만찮게 안겨줄 것이다.


학교에서 우정이 자라기를 기대했던가
흔히들 고등학교 친구만한 친구가 없다고들 말하지만, 1989년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내신등급제가 존재하는 한 고등학교 친구는 없다!” 새삼스럽다. 학교가 우정을 키워주는 곳이라고 생각했다면 너무 순진한 것이다. 애초에 학교는 친구를 사귀도록 고안된 곳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학교 운동장에서 또 군대 연병장에서 선착순 달리기를 하면서 우정이니 전우애를 키울 수 있었던 사람이 있을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학교에서 죽마고우를 사귈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본성이 워낙에 관계지향적이어서 그럴 것이다. 학교 시스템이 아무리 아이들 사이에서 우정이 생겨나는 것을 가로막아도, 우정이란 민들레처럼 콘크리트 틈새에서도 꽃을 피우는 법이다.
사실 진짜 우정은 학교 안에서 싹트기보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서, 동네 골목에서 생겨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나 이제 아이들은 더 이상 함께 등교길을 걷지도 않고 골목에서 놀지도 않는다. 아파트 평수별로 노는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서로를 갈구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노는’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분당 지역 고등학교에서는 이른바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의 교과서나 참고서, 노트가 곧잘 분실된다고 한다. 공부 노하우를 엿보려는 심리도 있겠고, 경쟁자를 곤란에 빠뜨려 조금이라도 앞서보려는 비열한 심보로 그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이 그곳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고, 입시 경쟁이 심한 지역의 학교 풍경은 어디나 비슷하다.
학교는 애초에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근대 국가를 위한 인적자원 양성소로 출발해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자본을 위한 인적자원 양성소로 무게중심이 이동한 정도의 변화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근대 학교의 평가 시스템 또한 애초에 통제를 위한 것이지 아이들의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교육부가 수능, 본고사, 내신을 놓고서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수를 둬봐도 학교교육이 제 자리를 잡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이들이 죽어나는데 어떻게 학교가 살아나길 기대하는가.
아이들을 잡아서라도 학교를 살리는 것이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다. 사회와 학교의 갭이 그다지 크지 않고, 근대화 과정에서 너도나도 선착순 달리기에 뛰어들어 죽어라고 달리면 앞자리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열려 있던 시절에는 학교는 그나마 삶의 희망을 주는 존재였었다. 그러나 학교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기회가 점점 사라져가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는 이 시대에 학교가 옛날 같이 통제 기능을 계속하기를 기대하기란 무리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육정책이 통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조삼모사 정책을 되풀이하고 있는 데는 ‘잘 살아보세’의 주문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데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근대화 시절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께서 우리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세뇌시킨 ‘민족중흥’의 본질은 다름 아닌 ‘GNP 1만 달러 달성’이었다. 허리띠를 조르고 또 조르면서 천신만고 끝에 그 목표를 달성한 국민들 앞에 새롭게 나타난 우리의 ‘상식적인’ 지도자는 지극히 상식적인 목표를 제시했다. GNP 2만 달러 시대! 새로운 사회의 비전을 소득수준으로 표시할 줄밖에 모르는 지도자의 수준은 사실 우리 국민들의 수준이다. 목표치가 1만 달러에서 2만 달러로 상향조정되었을 뿐 경제정책이나 교육정책에서 달라진 점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39호 <민들레 단상> 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