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을 바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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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폐지와 국공립대 통폐합에 대한 논의는 20여 년 전부터 계속되어왔다. (사진 _ 2012년 7월 3일자 한겨레 기사 중)


‘실비보험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일까

 

실비보험을 드는 이들이 적지 않다. 국민건강보험이 보장해주지 않는(못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집 근처에 공립학교가 있는데도 굳이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 사립학교에 아이를 보내거나 학원을 보내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공교육이 채워주지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립학교에도 공적 자금이 들어가므로 사립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것은 공교육의 혜택에 더해 자부담으로 (넓은 의미의) 사교육을 누리는 것이다. 대개는 사립학교 대신 ‘공립학교+학원’ 형태의 보험을 든다. 단점은 여러 개를 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실비보험 여러 개를 드는 것과 유사하다. 사립학교는 일종의 패키지 보험 상품이다. 여러 군데 학원을 다니는 대신 사립학교가 제공해주는 단일 보험에 가입하는 셈이다.

자립형 사립고를 없애는 것은 고액의 실비보험을 없애는 것과 유사하다. 고액 학원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자사고만 없애는 것은 사실상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정부가 특별교부금이라는 돈줄을 쥐고 있고, 법으로 존폐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만, 이는 개혁을 빙자한 교육의 하향평준화다. 패키지 상품을 없애면서 실비보험 여러 개를 들게 하는 조치나 다름없다. 정부는 실비보험을 금지하기보다 국민건강보험을 좀더 내실 있게 만드는 것이 낫다. 공교육을 내실 있게 만들면 자사고나 사교육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기 마련이다. 대학과 입시제도를 개혁해서 사교육이 선행학습 같은 반칙 행위로 공교육을 침범하지 않게 해야 한다. 현재의 공교육은 마치 건강보험이 실비보험에 먹혀버린 격이다.(실제 건보는 그렇지 않다는 게 천만다행이다.)

한국의 건강보험제도는 자부담이 꽤 높은 불완전보험이지만, 공교육이 건강보험 정도만 되어도 사교육에 대한 수요가 대폭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건강보험제도가 아무리 잘 정비되어도 실비보험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이는 나쁜 것이 아니라 공공서비스의 빈틈을 메우는 기능을 한다. 태권도 도장이나 피아노 학원은 퇴근이 늦은 부모 대신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맡고 있다. 서구에서 개별 가정이 베이비시터를 고용해서 하는 걸 우리는 학원에 맡기는 셈이다. 근대화 이전에 마을이 아이를 돌봤듯이 오늘날에는 학교와 학원이 마을 역할을 대신한다. 경제구조가 바뀌어 부모가 늦게까지 일터에 매이지 않아도 되면 학원의 역할이 줄어들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수요는 있을 것이다.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은 ‘사교육 없는’ 세상을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실비보험을 없애는 것이 국민건강을 지키는 길은 아닌 것처럼. 국민건강보험 제도가 실비보험 때문에 악화되는 것이 아니듯이 공교육이 부실한 것은 사교육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공교육의 부실이 사교육 성행의 원인이다. 입시제도를 개선해 소모적인 순위 경쟁을 막고 학교교육을 내실 있게 만들어야 한다. 실비보험 들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도 더 많은 의료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듯,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세상에서 태생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이는 아이들도 교육의 기회를 충분히 누릴 수 있게 돕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오늘날 사교육의 문제는 선행학습이라는 변칙 상품을 만들어 공교육을 초토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얼핏 보기에는 사교육 때문에 공교육이 무너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제의 원인을 잘못 짚는 것이다. 선행학습은 내신 등급을 올리기 위해 방학이 아닌 학기 중에도 아이들이 학원을 다니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낸 일종의 ‘기획상품’이다. 공교육의 허점을 파고들어 학원가가 담합하여 새로운 수요를 창출한 것이다. 선행학습을 비롯한 사교육 문제의 근본 원인은 입시제도와 대학서열화, 더 나아가 학력·학벌사회에 있다. 학력차별을 금지하는 것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사회개혁이다.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젠더 문제를 앞세워 계급(계층)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사회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다.

 

교육개혁, 더 이상 늦추어선 안 된다

 

학력차별과 대학서열화라는 뿌리 깊은 문제를 놔둔 채 입시제도를 이리저리 뜯어고쳐봐야 혼란만 더할 뿐이다. 시험제도를 바꾼다고 입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학력고사 대신 도입된 수능이 입시제도를 개선하고 아이들의 학력을 높이는 데 별 도움이 안 되었듯이, 국제바칼로레아(IB)를 도입한다고 입시위주 교육이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아마도 IB학원이라는 새로운 사교육 시장이 생겨날 가능성이 높다. 대학 서열화를 완화하는 현실적인 방안은 서울대를 연구 중심 대학원으로 개편하고 국공립 대학을 통폐합해 연고대 수준의 국립대학을 지역별로 하나씩 두는 것이다.(프랑스가 68혁명 이후 파리대학교를 13개 연합대학으로 개편한 것을 참고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지역균형발전을 도모하는 방안이자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개혁이 될 것이다.

사교육 시장은 한국식 자본주의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하지만 선행학습금지법이나 자사고 폐지 같은 사회주의식 정책은 편법과 교육의 하향평준화를 낳을 뿐이다. 촛불혁명(?) 덕분에 행정과 입법 권력까지 가졌던 문재인 정부는 개혁다운 개혁을 하나도 하지 못한 채 시늉만 하다 말았다. 중대한 역사적 실기를 범한 것이다. 자본주의를 제대로 해볼 궁리를 하지 않고 타도할 궁리를 하거나 어설픈 사회주의 정책을 시도하는 것이 좌파들이 흔히 저지르는 오류다.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원리를 이해하고 시장의 효율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평등을 강화하는 사회과학적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프리카 지역의 코끼리 멸종을 막은 것은 생태주의 이념이 아니라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이라는 사회과학이었다.

두 아이에게 케이크를 공평하게 나눠주는 방법은 한 아이에게 케이크를 자르게 하고 다른 아이에게 우선선택권을 주는 것이다. 어른이 케이크를 공평하게 잘라서 나눠주는 사회주의 방식보다 훨씬 효율적이면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이다. 코끼리를 보호하기 위해 사냥과 상아 거래를 전면 금지한 나라에서는 코끼리 수가 더 줄어든 반면 상아 거래는 허용하면서 각 군벌의 소유지 내에서 일정 기간 정해진 개체 수만 사냥을 허가한 나라에서는 코끼리 수가 더 늘어났다. 2007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은  (코끼리를 보호하는) 공익과 사익(군벌의 이익)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민간(군벌)이 서로를 견제할 수 있도록 메커니즘을 만듦으로써 공유지의 비극을 막는 이론이다.

진정성이나 이념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은 아마추어리즘이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을 수도 있지만, 그만한 물리적 시간이 요구된다. 축구도 정신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 기본 체력이 받쳐줘야 한다. 우리가 공교육을 개혁하지 못하는 것은 이념이 없거나 경제력이 딸려서가 아니라 이를 해낼 역량 있는 지도자가 없기 때문이다. 자사고 폐지와 정시 확대 같은 퇴행적 개혁(?)을 시도한 좌파 정부에 이어 자사고 존치와 경쟁력 강화를 외치는 우파 정부의 우향우 정책으로는 교육 문제도 사회 문제도 해결 난망이다. 뿌리가 썩고 있는데 잎사귀에 영양제를 뿌린다고 나무가 살아나지 않는다.

사교육 문제는 저출산 문제와도 연결된다. 아이를 낳아 잘 기를 엄두가 나지 않는 사회에서 출산장려금을 뿌린다고 출산율이 높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교육비 부담 때문에 노후 준비를 제대로 못한 부모 세대가 노년을 맞이하게 되면 고령화 사회의 그늘이 더 짙어질 것이다. 인서울 대학에 목매다는 현실을 방치하는 한 얽히고설킨 우리 사회의 문제는 점점 곪아갈 것이다. 사교육비 부담을 덜어준다며 공교육의 돌봄 기능을 강화하는 정책을 내놓지만 문제의 곁가지만 건드리는 격이다. 사교육은 사회악이 아니다. 아파트 상가의 피아노 학원 덕분에 부모들은 숨을 돌리고, 덤으로 임윤찬 같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나오기도 한다. 사교육은 있어도 사교육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길은 있다. 알면서 외면하고 있을 뿐.


*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경선 후보로 나온 유시민은 "학벌주의의 상징인 서울대학교의 학부를 폐지하고 대학원 과정 중심의 연구전문대학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밝혔다. (관련 기사 https://www.daili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859)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 이 글은 2023년 4월 4일자 <시민언론 민들레>에 실린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