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텔레비전 장수 프로그램 중에 거의 반세기를 이어오는 ‘장학퀴즈’가 있다.(1973년 MBC가 첫 방송을 시작한 이래 1997년부터는 EBS가 이어받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배움을 장려한다는 ‘장학’을 이름에 내건 드문 프로그램이다. 학교 대항 성격도 있어 이른바 명문학교의 경우 대회 출전자의 성적이 나쁠 경우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징계를 하는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나곤 했다. 일제고사로 학교별 등급을 매기던 시절이었다. 단편적인 지식을 묻는 객관식 문제와 단답형 주관식 문제가 섞여 있는 퀴즈 프로그램은 여러모로 학교 시험과 유사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합법적인 ‘컨닝’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정답을 모를 경우 외부인과 연결해 ‘전화 찬스’를 쓸 수 있게 한다. 대개 부모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받는다.
모르는 문제가 나왔을 때 전화 찬스를 쓸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찬스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으려면 인적 네트워크가 받쳐줘야 한다. 공평한 제도인 것 같지만 사실상 그가 속한 인적 네트워크의 질이 승패를 좌우하는 셈이다. 퀴즈대회뿐 아니라 인생의 중요한 길목에서 기득권층은 부모 찬스, 동문 찬스 등 더 유리한 기회를 갖는다. 격변기가 지나고 사회가 안정될수록 자수성가는 점점 힘들어진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부모 찬스가 작동하지 않는 영역을 찾기란 힘들다. 연예인들의 자녀는 부모 찬스로 쉽게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민다. 국회의원은 지역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대형 교회 목사들은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준다.
세습은 부계사회가 형성된 유사 이래 모든 인간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전체주의 사회인 북녘은 실상 세습 왕조 시대를 재현하고 있고, 민주주의 사회인 남녘의 유권자들은 아버지로부터 지역구를 물려받은 후보자에게 표를 던진다. 교회 신도들은 자신이 세습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대를 이어 목회자를 섬긴다. 역사적으로 세습의 폐해가 도를 넘어서면 민란과 혁명이 일어나 사회를 초기화해왔다. 리셋 버튼이 눌러지지 않도록 적절한 선에서 기득권을 추구하는 일은 쉽지 않다. 관성과 가속도의 힘은 인간 사회에도 작용해서 폭주를 멈추기란 어렵다. 브레이크 장치로 민주주의가 발명되었지만 성능이 그다지 좋진 않다.
조국 사태 이후 ‘부모 찬스’와 ‘공정’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정치권이 ‘정시 확대’라는 퇴행적인 정책을 내놓았다.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줄 세우자’는 능력주의 사고는 부모 찬스 없이 오로지 개인의 시험 성적만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경쟁 시스템을 지향하지만, 실제로 부모 찬스는 엄마 배 속에서부터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애써 외면한다. 대치동 아이들이 구로동 아이들과 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고는 누구도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부모 찬스는 고사하고 부모를 돌봐야 하는 상황에 놓인 아이들은 원천적으로 불리한 경쟁을 해야 한다. 이런 사회에서 객관식 시험의 공정성을 운운하는 것은 사실상 눈 가리고 아웅하는 일이다.
객관식 시험은 채점에 주관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점 말고는 공정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족집게 강사의 강의를 들은 아이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시험이다. 정시 확대는 아이들의 역량을 기르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고교 교육이 객관식 문제 풀이에 올인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강남 아이들의 지적 역량도 거기에 맞춰질 것이므로 길게 보면 국가의 장래를 가로막는 자충수에 가까운 정책이다. 선진국을 보고 베끼면 되던 시절에는 아이들을 줄 세우는 평가만으로도 필요한 인재를 충원할 수 있었지만, 이제 그런 인재로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다. 교육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정체되고 곧 퇴보하게 될 것이다.
AI혁명이 진행되는 이 시대에 십대 시절을 객관식 문제 풀이나 하면서 보내게 할 것인가. 정시 확대는 길게 보면 보수를 지지하는 계층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정책이다. 아이들을 위해서나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평가제도의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는 엘리트 교육도 필요하고, 부모 찬스를 쓸 수 없어 엘리트가 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도 기회를 열어줄 수 있어야 한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인간 사회에서 국가는 부모를 대신해 아이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책무가 있다. 공정한 사회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잘못된 공정 담론이 교육정책을 왜곡시키지 않도록 주의할 일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텔레비전 장수 프로그램 중에 거의 반세기를 이어오는 ‘장학퀴즈’가 있다.(1973년 MBC가 첫 방송을 시작한 이래 1997년부터는 EBS가 이어받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배움을 장려한다는 ‘장학’을 이름에 내건 드문 프로그램이다. 학교 대항 성격도 있어 이른바 명문학교의 경우 대회 출전자의 성적이 나쁠 경우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징계를 하는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나곤 했다. 일제고사로 학교별 등급을 매기던 시절이었다. 단편적인 지식을 묻는 객관식 문제와 단답형 주관식 문제가 섞여 있는 퀴즈 프로그램은 여러모로 학교 시험과 유사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합법적인 ‘컨닝’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정답을 모를 경우 외부인과 연결해 ‘전화 찬스’를 쓸 수 있게 한다. 대개 부모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받는다.
모르는 문제가 나왔을 때 전화 찬스를 쓸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찬스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으려면 인적 네트워크가 받쳐줘야 한다. 공평한 제도인 것 같지만 사실상 그가 속한 인적 네트워크의 질이 승패를 좌우하는 셈이다. 퀴즈대회뿐 아니라 인생의 중요한 길목에서 기득권층은 부모 찬스, 동문 찬스 등 더 유리한 기회를 갖는다. 격변기가 지나고 사회가 안정될수록 자수성가는 점점 힘들어진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부모 찬스가 작동하지 않는 영역을 찾기란 힘들다. 연예인들의 자녀는 부모 찬스로 쉽게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민다. 국회의원은 지역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대형 교회 목사들은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준다.
세습은 부계사회가 형성된 유사 이래 모든 인간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전체주의 사회인 북녘은 실상 세습 왕조 시대를 재현하고 있고, 민주주의 사회인 남녘의 유권자들은 아버지로부터 지역구를 물려받은 후보자에게 표를 던진다. 교회 신도들은 자신이 세습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대를 이어 목회자를 섬긴다. 역사적으로 세습의 폐해가 도를 넘어서면 민란과 혁명이 일어나 사회를 초기화해왔다. 리셋 버튼이 눌러지지 않도록 적절한 선에서 기득권을 추구하는 일은 쉽지 않다. 관성과 가속도의 힘은 인간 사회에도 작용해서 폭주를 멈추기란 어렵다. 브레이크 장치로 민주주의가 발명되었지만 성능이 그다지 좋진 않다.
조국 사태 이후 ‘부모 찬스’와 ‘공정’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정치권이 ‘정시 확대’라는 퇴행적인 정책을 내놓았다.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줄 세우자’는 능력주의 사고는 부모 찬스 없이 오로지 개인의 시험 성적만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경쟁 시스템을 지향하지만, 실제로 부모 찬스는 엄마 배 속에서부터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애써 외면한다. 대치동 아이들이 구로동 아이들과 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고는 누구도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부모 찬스는 고사하고 부모를 돌봐야 하는 상황에 놓인 아이들은 원천적으로 불리한 경쟁을 해야 한다. 이런 사회에서 객관식 시험의 공정성을 운운하는 것은 사실상 눈 가리고 아웅하는 일이다.
객관식 시험은 채점에 주관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점 말고는 공정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족집게 강사의 강의를 들은 아이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시험이다. 정시 확대는 아이들의 역량을 기르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고교 교육이 객관식 문제 풀이에 올인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강남 아이들의 지적 역량도 거기에 맞춰질 것이므로 길게 보면 국가의 장래를 가로막는 자충수에 가까운 정책이다. 선진국을 보고 베끼면 되던 시절에는 아이들을 줄 세우는 평가만으로도 필요한 인재를 충원할 수 있었지만, 이제 그런 인재로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다. 교육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정체되고 곧 퇴보하게 될 것이다.
AI혁명이 진행되는 이 시대에 십대 시절을 객관식 문제 풀이나 하면서 보내게 할 것인가. 정시 확대는 길게 보면 보수를 지지하는 계층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정책이다. 아이들을 위해서나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평가제도의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는 엘리트 교육도 필요하고, 부모 찬스를 쓸 수 없어 엘리트가 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도 기회를 열어줄 수 있어야 한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인간 사회에서 국가는 부모를 대신해 아이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책무가 있다. 공정한 사회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잘못된 공정 담론이 교육정책을 왜곡시키지 않도록 주의할 일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